
“‘매니저’ 몇 명이 나를 ‘다크 룸’으로 끌고가 자백할 것이 없느냐며 때리기 시작했어요. 돈을 훔쳤다고 강제로 자백하게 한 뒤에 매니저 한 명이 먹을 것을 가져다 주더니 ‘이게 너의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저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몸값을 내고 떠나거나, 이 방에 갇혀 굶어 죽거나, 손과 팔, 다리를 부러뜨린 뒤 캄보디아 경찰에 넘겨지는 것 중에 고르라고 했죠.”
국제 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지난 6월 발간한 캄보디아 내 온라인 사기 감금 범죄 관련 보고서에 등장하는 17세 태국 소년 사왓이 겪은 일이다. 사왓은 “세 가지 중에 선택할 시간을 주겠다”며 매니저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건물 8층에서 옆 건물로 뛰어내려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국인 대학생 A씨가 캄보디아에서 고문으로 숨진 가운데 앰네스티의 보고서에는 A씨가 당한 것과 유사한 피해를 본 생존자 다수의 증언이 실렸다. 이는 곧 캄보디아 내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온라인 사기 범죄 강요 및 감금, 고문 등이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보고서는 지난 2023년부터 올 5월 사이 캄보디아에서 강제 노동과 고문 등에 시달린 피해자 58명에 대한 실제 인터뷰 및 관련 인권 단체 등이 수집한 365명의 자료 검토를 근거로 작성됐다. 242쪽 분량의 보고서 제목은 ‘나는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이다.
직접 진술한 58명만 보면 중국, 베트남, 태국 등 국적으로 한국인은 없다. 다만 보고서는 “피해자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22개국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감금 시설 최소 53곳, 시설 전반서 가혹행위
보고서에 따르면 앰네스티가 파악한 감금 시설만 53곳이었다. 주목할 대목은 숨진 A씨가 당한 것과 유사한 고문 및 가혹행위가 시설 전반에서 거의 패턴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뷰에 응한 58명 중 45명이 직·간접적으로 고문 등에 노출됐다고 증언했다. 고문은 ‘매니저’나 ‘보스’로 불리는 사람들이 자행했다.
중국인 남성 진은 타자를 칠 줄 모른다는 이유로 고문당했다. 폭행 뒤 사흘간 앉지도 못한 채 서 있도록 했다. 한번 때리기 시작하면 몇 시간씩 계속되기도 했다. 7일 동안 감금됐고, 식사는 하루에 한 끼만 제공됐다. 그런 뒤에도 타자를 치지 못하자 전기 고문이 시작됐다. 진은 “그들은 충전된 게 다 방전될 때까지 계속 전기 고문을 했다”고 말했다. 진의 배와 팔에는 이로 인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보고서는 생존자 27명이 전기 고문이나 전기 충격봉에 대해 증언했다고 밝혔다. 놀라운 건 충격봉의 모양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10명이 서로 다른 시설에 잡혀 있었는데도 묘사가 거의 일치했다는 점이다. 30~50cm 길이에 검은색, 끝부분에는 전극이 있고 손잡이 근처에 있는 버튼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사왓이 증언한 ‘다크 룸’도 복수의 시설에 존재했다. 창문 등이 없어 어둡고, 가구 등도 전혀 없는 곳으로 주로 가혹 행위가 이뤄지는 고문실로 보인다. 보고서는 최소 22개 시설에 다크 룸이 있었고, 탈출을 시도하거나 외부에 도움을 요청한 이들은 여지없이 다크 룸으로 끌려갔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30곳이 넘는 장소에서 사용된 고문 및 가혹행위의 도구와 방식이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은 피해자들의 증언에 더 큰 신빙성을 더한다. 이는 캄보디아 내 감금 시설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A씨처럼 취업 사기로 입국한 피해자도 다수였다. 18세 베트남 소녀 리사는 풀장이 있는 호텔에서 일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캄보디아에 왔다. 방학 때 용돈을 벌 일거리를 찾으려는 것뿐이었지만, 11개월 동안 감금됐다 올 초에야 풀려났다.
리사는 두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모두 잡혔다. 다크 룸으로 끌려갔고, 3명의 남성이 리사를 바닥에 찍어 눌렀다. 보스가 쇠막대기로 리사의 발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비명을 멈출 때까지 계속 때릴 거야.” 그들은 리사에게 소리도 내지 못하게 했다. 리사는 걸을 수 없어 몇 주 동안 방에 누워 있어야 했다. 리사의 의료기록상 부상은 그의 진술과 일치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보이스피싱 등 온라인 사기 범죄 동원
강제노동은 일상이었다. 대부분 피해자가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했고, 16시간씩 일했다는 피해자도 있었다. 이들은 보이스 피싱, 신분 도용이나 로맨스 스캠 등 다양한 온라인 사기 범죄에 동원됐다. 범죄 조직은 이들이 온라인 사기를 저지르는 장면을 녹화해 “탈출하려 하면 캄보디아 경찰에 불법 행위로 넘겨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대부분은 제대로 된 급여는 받지 못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또 고문을 당했다. 고문은 종종 감금된 다른 피해자들이 모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보고서가 확인한 별도의 고문실 중 방음 처리가 된 곳은 한 곳 뿐이었다.
말레이시아 여성 시티는 한 베트남 남성이 당한 가혹행위를 자세히 묘사했다.
“한 열 명쯤 달려들어서 몸이 완전히 보라색이 될 때까지 때렸어요. 20~30분 정도, 아령 같은 것으로 몸과 다리를 때리고, 몸에 전기봉을 대고 전기도 흘려보냈어요. 나중에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고, 완전히 기운이 빠질 때까지 때렸어요.”
인터뷰 대상자 중 9명은 청소년이나 어린이였다. 최연소는 14세였다. 중국에서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로 인신매매된 14세 베이헤와 15세 아이한은 시설에 도착하자마자 성인으로 생년월일이 위조된 문서를 받았다. 매니저는 이들에게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리면 다시는 집에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다른 피해자들을 고문하는 영상을 억지로 보게 했다.
앞서 A씨와 함께 감금됐던 이들은 A씨가 팔려왔다는 진술도 했는데, 보고서에서도 빈번한 인신매매가 확인됐다. 생존자 58명 중 23명이 직접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목격했다. 시설 간에 이동하기도 했고, 같은 시설 내에서 다른 범죄 조직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정해지는 몸값은 곧 이들이 갚아야 하는 빚이 됐다. 보고서는 “이런 빚은 임의로, 때로는 일을 할수록 더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끊어낼 수 없는 고리였던 셈이다.
코로나19 뒤 온라인 도박→온라인 사기
보고서는 산업화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한 캄보디아의 온라인 사기 산업이 확산한 배경도 짚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동남아 지역에서는 카지노와 온라인 도박이 성업했다. 중국 본토에서 도박이 금지되자 중국 범죄조직이 동남아로 눈을 돌린 것이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이 주무대였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국경 봉쇄가 강화되자 수익이 급감했다. 범죄 조직들은 이미 보유한 부동산 인프라, 즉 호텔과 카지노 등을 활용해 온라인 사기에 뛰어들었다. 2019년 중반 중국의 압박으로 캄보디아 정부가 온라인 도박을 금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팬데믹이 끝나고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인신매매 조직이 활성화했고, 다양한 방법으로 인력을 충원해 지금까지도 감금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2022년 무렵이 되자 캄보디아는 동남아 내 온라인 사기 산업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부상했다. 실제 한국인 피해 신고가 급증한 것도 직후다.
앰네스티는 캄보디아 정부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지적했다. “조직범죄와 부패한 공권력의 결합 구조” 덕에 이런 범죄 산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앰네스티가 파악한 감금 시설 53곳 중 20곳에 캄보디아 경찰이나 군이 개입했지만, 이후에도 감금과 가혹 행위 등이 이어졌다고도 보고서는 지적했다. 정부 단속 뒤 실제로 폐쇄된 시설은 두 곳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태국 소녀 리사가 감금됐던 시설은 불과 몇 개월 전 경찰이 급습해 단속을 벌인 곳이었다.
앰네스티는 캄보디아 정부를 향해 모든 사기 감금 시설을 폐쇄하고, 고문 등 인권 침해 행위를 조사하라고 촉구했다. 또 시설의 소유자와 관리자, 경비원뿐 아니라 범죄에 관여한 국가 공무원도 찾아내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