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니 병실이었다. 2021년 11월 19일, 25톤 덤프트럭 기사였던 임훈섭(52)씨는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었다. 하반신에 감각이 아예 없었다. 회진 온 의사에게 임씨가 “다리 쓸 수 있냐”고 물었다. “2% 미만 확률”이라는 절망적인 답이 돌아왔다. 임씨는 “쓸 수도 없는 다리 바로 잘라 달라고 했다. 의사가 그런 병원은 없다고 하더라. 할 수 없이 달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랬던 다리로 세계대회 정상에 섰다. 임씨가 소속된 연세대 연구팀은 ‘사이배슬론 2024’ 재활 로봇자전거 종목에서 26일 한국 최초로 우승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4년마다 개최되는 사이배슬론은 일명 ‘사이보그 올림픽’이라고 불린다. 로봇자전거 종목에선 총 10개 팀에 참여했다. 파일럿을 맡은 임씨는 1960m 트랙을 6분 2초 만에 완주해 직전 대회 우승국인 네덜란드를 3초 차로 제쳤다.
임씨가 탄 삼륜 로봇자전거는 장애인의 근육 상태를 분석하고 손상된 운동신경을 대신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AI 알고리즘으로 최적의 근육수축 신호를 생성하고 외부 동력 없이 근육만으로 자전거를 주행할 수 있다.
임씨가 연구팀에 합류한 건 지난해 6월이었다. 운전대를 놓은 뒤 경제 형편이 날로 나빠지고 있을 때였다. 장애인 연금 등을 받고 집에만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근육질이었던 다리가 얇아지고 배가 나오는 것도 보기 싫었다. 때마침 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서 파일럿 일을 권유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합류한 연구팀에서 그는 둘도 없는 동료를 얻었다. 아들뻘 되는 팀원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팀에는 임 선수 외에도 김수안, 이수근 선수가 파일럿으로 소속돼 있다. 우승 직후 임씨는 “자전거 종목 덕분에 사회로 나와 많은 사람과 어울릴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신동준 연세대 ‘인간중심AI로보틱스’ 연구팀에게도 임씨는 구원자였다. 신 교수팀은 2018년 로봇자전거 팀 ‘BeAGain’을 만들어 사이배슬론 2020에 출전했지만 5위에 그쳤다. 애타게 새로운 파일럿을 찾았다. 전업으로 고된 훈련에 시간을 쏟을 하반신 완전 마비 장애인은 흔치 않았다. 신 교수는 “기술을 빛낼 파일럿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임 선수는 면접에서부터 투지가 남달랐다”고 말했다.
연구팀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스스로 “깡다구 있는 성격”이라는 임씨는 아플 때도, 우울할 때도 줄기차게 페달을 밟았다. 양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두 번 칼로 베어냈다. 그 사이 임씨의 허벅지 둘레는 44㎝에서 52㎝까지 커졌다. 연구팀은 아예 임씨를 지난해 10월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임씨의 피드백을 토대로 그의 체형에 맞게 자전거를 수차례 개조했다. 자전거 체인의 톱니바퀴 수까지 조정할 정도였다. 다리뿐 아니라 상체와 엉덩이 근육의 힘을 전달하는 등 기술 개선도 이뤄냈다.
신 교수는 사람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는 “마비 환자뿐 아니라 근력 보조가 필요한 노약자와 이동이 불편한 비장애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스마트 모빌리티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오토바이 마니아이기도 한 임씨는 “지금처럼 삼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면서 인생을 오랫동안 즐기는 게 소망”이라고 했다. 그는 “두발자전거도 타고 싶다. 연구팀은 중심을 못 잡아 안 된다고 말리지만 왠지 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