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범 교수의 세상을 보는 눈

[천안=동양뉴스] 동지(冬至)가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손을 내밀면 공기의 차가움이 먼저 와 닿는다. 어떤 날은 살을 에고, 어떤 날은 견딜 만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너무 차갑게 느껴지면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버거워진다. 하지만 커피 한 잔의 김, 길가의 나무, 스쳐 지나간 인사(人事)의 온기(溫氣)만으로도 마음은 말랑해지며 그렇게 하루는 다시 견딜 만해진 다. 그 차이가 바로 삶의 온도(溫度)가 아닐까. 삶의 온도는 숫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온계로 재도 잡히지 않고, 누군가 대신 느껴줄 수도 없다. 내가 따뜻한지, 아니면 조금 식어 있는지. 그럼에도 어느 순간 문득 알게 되는 것은 하루를 대하는 마음의 결(結)이 있기 때문이리라. 삶이 따뜻하다고 해서 항상 행복(幸福) 한 것은 아니다. 울 일이 없고 아픔이 사라졌다는 말도 아니다. 넘어졌을 때 손을 잡아주는 기억, 혼자여도 고립(孤立)되지는 않았다는 느낌,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 이런 것들이 모여 아픔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며 온도를 조금씩 데우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 사이도 그렇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일지라도 어떤 관계에서는 따뜻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진다. 흔히들 관계(關係)를 좋다 나쁘다로 나누지만, 조금 생각을 달리해 보면 관계에도 각자의 온도가 나뉘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적당한 따뜻함’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관계의 온도가 아닐까.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상태. 상대의 말 한마디가 부담이 되지 않고, 침묵(沈默)마저 불편하지 않은 온도. 이런 관계라면 애쓰지 않아도 되고 자신을 증명(證明)하지 않아도 과도하게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곁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늘 그 온도를 유지하고 있지 않기에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 온도를 맞추기는 어려운 것이다.
어떤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과열될 수 있다. 관심(關心)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배려(配慮)라는 이유로 경계(經界)를 넘어서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따뜻함으로 느껴졌던 것이 어느 순간 숨 막히는 열기로 변한다. 이런 관계에서는 작은 거리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답장이 늦으면 서운함이 되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거절(拒絶)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너무 뜨거운 관계는 서로를 데우기보다 지치게 만든다. 반대로 점점 식어가는 관계도 있다. 외로움은 꼭 혼자일 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마음이 닿지 않을 때, 애써 웃고 있지만 속이 텅 비어 있을 때 관계는 서서히 식어간다. 예전에 자연스럽게 오가던 안부(安否)는 형식(形式)이 되고, 웃음이 줄어든다. 특별히 다툰 것도 없는데 어느새 말수가 줄어든다. 차가워진 관계의 특징은 무관심일 것이다.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失望)도 없고, 기대가 없으니 노력(努力)도 사라진다. 얼어붙은 관계는 깨지지는 않을지언정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의 온도가 항상 상대(相對)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같은 사람과의 관계도 내가 지쳐 있을 때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고, 마음에 여유(餘裕)가 있을 때는 훨씬 따뜻하게 느껴진다. 결국 관계의 온도는 두 사람 사이의 공기(空氣)이면서 동시에 각자의 상태(狀態)를 비추는 온도계이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듯 관계도 변하기 때문에 모든 관계가 평생 같은 온도로 유지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관계가 나에게 어떤 온도로 다가오는지 스스로 느껴보는 일이다.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관계인지, 아니면 나를 조금 더 살아 있게 만드는 온도인지. 그리고 그 온도를 견딜 수 있는지, 조절할 수 있는지, 혹은 내려놓아야 하는지 판단(判斷) 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종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작정 온도를 올리려고 더 자주 연락하고, 더 많이 이해하려 애쓰지만 관계는 난방처럼 한쪽에서만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세심한 조절(調節)이다. 너무 뜨거워졌다면 잠시 창문을 열 듯 거리를 두는 용기, 너무 차가워졌다면 작은 말 한마디로 온기를 건네는 진심(眞心)이 필요하다.
큰 성공(成功)이나 극적인 변화(變化)보다 사람 사는 일은 결국 온도 맞추기의 연속이다. 너무 뜨겁지 않게, 너무 차갑지 않게. 나도 상하지 않고, 상대도 부담스럽지 않은 온도. 오늘 내가 건네는 말 한마디와 침묵 하나가 관계의 온도를 얼마나 올리고 내리는지 생각해 보자. 같은 온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온도를 존중(尊重) 해 줄 때 비로소 성숙(成熟) 한 관계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삶이 차갑게 느껴질수록 더 거창한 해답(解答)을 찾기보다, 온도를 1도만 올릴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를 덜 몰아붙이는 것, 쉬어도 괜찮다고 허락하는 것, 좋아했던 것을 다시 꺼내보는 것처럼.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은근하게 따뜻해져도 충분하다.
삶의 온도는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다정한지에 달려 있다. 한 번에 뜨거워지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 나에게 주는 온도보다, 내가 나에게 건네는 온도가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다가오는 병오년(丙午年)의 삶이 조금 미지근하더라도 괜찮다. 차갑지만 않다면, 그걸로도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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