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병오년의 행복

2025-12-26

2025년도 저물어간다. 나 자신과 가족과 사회의 안녕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한 해. 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행복했을까.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아등바등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길을 잃은 채 행복이란 단어조차 잊고 살아오진 않았을까.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이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구조적 불일치에서 찾았다. 사람의 욕망은 일직선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데 비해 행복은 반복을 통한 나선형 구조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면서다. 이는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는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며, 행복의 감정은 그런 기억이 하나둘 쌓이면서 조금씩 숙성돼 간다는 깨달음과도 일맥상통한다. 앞이 보이지 않던 헬렌 켈러가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들이 또 열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작 열린 문을 보지 못하곤 한다”며 근시안적인 조급함을 경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힘차게 달리는 말은 행운·행복 상징

힘든 이웃도 함께 복받는 새해 되길

‘인간은 걱정하는 존재’라는 점도 행복의 근원적 걸림돌로 작용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어니 젤린스키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우리가 하는 걱정 중 96%는 절대 일어나지 않거나 이미 벌어진 사소한 일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4%만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한평생 쓸데없는 걱정거리에 매몰돼 살다 보니 행복을 느낄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행복했던 시간을 다 합쳐 보니 2박 3일이 안 되더라”는 칼릴 지브란의 회고도,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베트 속담도 걱정과 고민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오랜 성찰의 결과물일 터다.

더 큰 장애물은 과도한 욕망, 즉 과욕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돈과 권력과 자리를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된 자들, 그게 삶의 유일한 목표가 돼버린 자들, 그게 행복이라고 믿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이는 소금물과 같아 마실수록 더 큰 갈증만 느끼게 될 뿐. 하나를 채워도 마음속엔 공허함만 남고,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공허함과 싸우다 끝내 욕망의 노예가 돼버린 자들을 숱하게 봐오지 않았나. 이들이야말로 행복을 쟁취하겠다며 세상의 소유에 집착하다 오히려 더 불행해진 자들이 아니겠는가.

행복은 어쩌면 모래성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엄청 쌓은 듯싶은데 내일 보면 그새 다 사라져 버린 모래성. 그런데 우리 곁엔 왜 자꾸 흘러내리냐며 짜증만 내는 사람, 돈으로 시멘트벽을 두르는 사람, 심지어 자기 이익을 위해 옆의 모래성을 쓰러뜨리는 사람까지 온갖 군상이 뒤섞여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매일 그렇게 조금씩 쌓아가는 게 결국엔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지 않을까. 무너지면 좀 어떤가. 다시 쌓을 수 있는 또 다른 오늘이 있지 않은가. “행복은 나비와 같아서 잡으려 하면 늘 달아나지만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 우리 어깨에 내려와 앉는다”는 나다니엘 호손의 고백처럼 기다림의 지혜도 때론 필요하지 않을까.

안타까운 건 행복이란 단어조차 사치인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동네 상가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자영업자들, 저녁 알바 뛰며 가족을 부양하는 평범한 가장들, 취업하려는 노력마저 포기한 ‘쉬었음’ 청년들, 남은 인생을 홀로 마주하고 있는 220만 독거노인 등. 극심한 양극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아픔도 더 늦기 전에 함께 헤아려야 할 때다.

중세 이후 유럽에선 말발굽이 행운의 상징으로 통했다. 힘차게 달리는 말이 복을 부른다는 믿음에서다. 마침 2026년은 말띠 해. 부디 새해엔 그 복이 어려운 우리 이웃들에게도 퍼져 나가기를. 그래서 행복이란 두 글자가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기를. 그게 병오년 새해 우리가 꿈꾸는 ‘함께 가는’ 공동체의 모습이기를.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