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에 구애한 여자가 아니라 제국·자본에 맞선 독립운동가 ④ 최영숙

2025-05-01

‘인도 청년과 가약 맺은 채 세상 떠난 최양의 비련, 서전(瑞典, 스웨덴의 한자식 표기) 대학에서 인도 청년 가약 맺고 애아(愛兒)까지 나온 뒤에, 서전 경제학사 최영숙양 일대기’. 잡지 ‘삼천리’의 1932년 5월 1일자 기사 제목이다.

최영숙 사망(4월 23일) 8일 뒤 나온 이 기사 제목은 1920~30년대 ‘신여성’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재현 방식과 대중의 편견을 드러낸다. 당시 ‘한국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이자 스웨덴 유학생’의 ‘사생활’에만 주목한 선정 보도를 두고 “야박한 세상 사람 혀끝과 붓끝에 오르내리게 되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신여성’) 같은 비판과 반론을 담은 기사도 나왔다. 90여 년이 지난 지금 득세하는 건 허구도 마다하지 않으며 이야깃거리로 취급하는 삼천리 부류의 보도다. 당시 삼천리는 “동무와 손을 잡고 스키하러 다니던 일”이라는 최영숙의 글 중 ‘동무’를 ‘그’로 바꾸며 ‘생활기’를 ‘연애담’으로 만들려 했다. 최영숙이 다닌 스웨덴의 두 학교에 다른 아시아 사람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인도 청년과의 연애, 임신과 출산, 귀국 뒤 빈곤과 사망 같은 가십 위주의 접근은 지금도 이어진다.

최영숙 생애를 제대로 들여다본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우미영(한양대 인문과학대 교수)은 2006년 ‘신여성 최영숙론 - 여성의 삶과 재현의 거리’를 발표했다. 동무를 그로 바꾼 삼천리 보도의 문제점 등을 분석했다. 최영숙과 도산 안창호의 관계를 둘러싼 남성들의 서술 문제도 들여다봤다.

최영숙은 중국에 머물 때인 1924년 흥사단에 입단했다. 흥사단 입단과 도산 안창호의 관계 문제는 또 다른 가십과 매도로 이어졌다. 우미영의 논문은 “(최영숙이 안창호의) 도덕적 인격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 타자화”되고 “남성 중심적 시선이 행사하는 권력에 의해 여성의 삶이 갖는 실체성은 억압”되는 문제를 다룬다. 1920~30년대 안창호와 최영숙의 관계를 두고 나온 서술은 “흥사단 활동을 하는 가운데 선배와 후배 또는 선생과 제자로서 서로 아꼈다”는 정도였다.

이 간략한 서술이 1940년대 들어 ‘최영숙 여사 사건’ 등으로 확장, 왜곡된다. ‘안창호가 난징에 왔을 때 최영숙이 찾아가 청혼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웨덴으로 유학갔다’는 게 골자다. 선우훈은 ‘최영숙양과 안도산’이란 글에서 “수포로 돌아감을 알고 남경(난징)에 더 주재할 면목이 없게” 되자 중국을 떠났다고 ‘해석’했다. “검둥이가 나올 것을 비탄하고 음독자살”을 했다고 단정했다. 이광수는 최영숙을 ‘남의 맘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안창호가 어떻게 그 여자가 상처받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잘 선택하게끔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요한은 안창호가 ‘최영숙의 청을 점잖게 거절했듯이 평양 기생들의 꾀임이나 기생물림으로 돈도 많이 가진 여자의 청도 단호하게 물리쳤다’는 식으로 적었다.

이런 남성들의 서술에서 최영숙의 중국과 스웨덴 유학 시절 공식 활동과 기록은 인정받지 못했다. 우미영은 “여성 주체의 삶이라는 전체의 맥락은 상실되고 남성 주체의 중심에서 해석된 부분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 결과 그녀의 삶은 남성 서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한히 허구적으로 복제될 수 있다”고 했다. 안창호 전기에서 기록에 따라 최영숙은 음독자살로도, 병사로도 적힌 점을 예로 든다. 최영숙의 청혼도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사실과 기록으로 최영숙의 활동을 재조명한 이는 이효진(이탈리아 카포스카리 베네치아 대학교 한국학 과정 조교수)이다. 스웨덴의 여러 아카이브, 신문·잡지 기록을 근거로 2018년 논문 ‘신여성 최영숙의 삶과 기록: 스웨덴 유학 시절의 신화와 루머, 그리고 진실에 대한 실증적 검증’ 논문을 냈다. 최영숙이 학사 학위를 받은 곳은 스톡홀름대가 아니라 ‘사회정치와 정책 연구소’라는 점을 확인했다. 스톡홀름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곳이다. 수업과 활동을 공유했다. 최영숙은 스톡홀름대 여성모임 멤버였다. 스톡홀름대 학생 잡지도 최영숙 활동을 기록했다. 이 연구소는 1977년 스톡홀름 대학에 정식 편입된다. 1928년 9월에 입학해 1930년 6월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효진은 최영숙이 공부한 연구소와 시그투나 인민학교에 인도인이 없었다는 점도 이 논문에서 확인했다.

2023년엔 추가로 자료를 찾아 ‘스웨덴 소장 신여성 최영숙 관련 자료 소개’를 세 편 연이어 냈다. 그간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이 자료 중엔 최영숙이 다닌 시그투나 인민학교 교장 하랄드 달그렌이 1934년 쓴 추모사가 있다. 그는 최영숙의 일상과 일생을 정리했다. ‘스웨덴 속어와 유머까지 잘 이해했고, 바늘과 실을 사용하는 일에 세련된 취향을 보였으며,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했다’고 한다.

돈도 없고, 스웨덴 말도 못했다

애정 어린 이 관찰자는 최영숙의 유학 전후 시기와 정착 과정을 두고 “(영숙의 아버지는) 일본에 저항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가했고 일본의 감옥에서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라며 이렇게 적었다. “영숙의 아버지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논을 판 돈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녀는 중국 여권을 만들어 중국과 시베리아 그리고 유럽의 러시아까지 이르는 길고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혼자의 몸으로 채 20세도 되지 않았었지만 영숙에게 두려움이라는 글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루, 그녀는 스톡홀름의 쉡스브론(거리 이름)에서 빈 지갑을 들고 아는 이 하나 없이 스웨덴어도 하지 못 하는 상태로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길을 찾고 자신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도 찾았습니다.” 최영숙은 스웨덴 현지 여러 기독교 단체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수와 언론 기고, 번역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최영숙이 주눅 든 채 현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지 않았다는 걸 하랄드 달그렌 글에서 확인한다. “영숙은 지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좋은 인성을 지녔습니다. 무신경해 보이는 그녀의 겉모습 속에는 큰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영숙은 비정상적일 만큼 진실에 충실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것에는 따르지 못하는 어찌할 수 없는 성향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독립심이 그녀의 자존감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강한 의지는 영숙의 따뜻하고 신실하며 참여적이고 감사하는 마음과 섞여 있었습니다.”

스톡홀름에서의 생활과 활동을 두고 “뒤처지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자 했던 영숙의 목표는 그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 영숙은 그녀가 꿈꿔왔던 일, 서울이라는 부유한 수도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일을 시작했습니다”라고 적었다.

최영숙의 스웨덴 유학 전후 공부와 활동은 이 추모사와 맞아떨어진다. 시그투나스티프텔센 도서관 1927년 4월 발표한 글을 소장하고 있다. 최영숙은 “스웨덴에서 춤을 추는 청년들을 볼 때 저는 감옥에 있는 저의 가난한 동지들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들의 힘은 마치 저녁 하늘의 해처럼 가라앉을 것이고 억압받는 이들의 태양은 다시 떠오를 테니까요”라고 적었다.

이후 최영숙은 ‘사회정치와 정책 연구소’에서 ‘국가지식론’ ‘사회교육법’ ‘사회복지와 보호론’ ‘사회위생학’ ‘국가경제학’을 배웠다. 앞서 최영숙은 중국에서 스웨덴으로 떠날 때 사회주의 서적을 가지고 있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이효진은 “그녀의 관심이 사회주의 이론에서 사회경제학, 노동자와 복지 등의 실용주의적 학문으로 옮겨갔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여성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이어졌다. 동아일보 1931년 11월 29일자 ‘서전에 류(유)학 九(9)년 만에 귀국한 최영숙씨’를 보면 정신적, 경제적으로 풍유한 생활을 하는 스웨덴의 전매국이나 성냥 제조장 여성 노동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노동 여성 운동을 계획하고 있으나 집에 와 보니 내가 먹을 것 준비할 몸이 된 처지이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내 자신이 직업여성으로 나설 결심”이라고 말했다. 이후 서대문에 채소 가게를 차린 것으로 보인다.

이효진은 최영숙의 스웨덴 현지 독립운동에도 주목했다. 최영숙은 스웨덴에 중국 여권을 가져갔다. 일제 강점기라 한국 여권을 받을 수 없었다. 스웨덴 현지에서는 한국인으로 살았다. 한복을 입고 다니곤 했다. 사회정치와 정책연구소의 학생 카드에는 국적이 ‘Korea다. 이효진이 찾은 자료 하나는 스웨덴의 유명 백화점인 NK백화점의 동양전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사진이다. 주로 중국 물품을 소개하는 전시였다. 최영숙은 한복을 입고 가 서예 시범을 보였다. 관련 기사에 이 사진이 나온다.

최영숙은 늘 일제 강점기 한국 상황을 알리려 했다. 1929년엔 “11월에 최영숙이 주최하는 한국의 밤 행사−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참여하지는 못했지만−가 있었다”라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최영숙은 앞서 1927년 4월 시그투나 인민학교 잡지에 ‘한국의 청년들’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국은 선조들이 5000년간 평화 속에서 살아온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1910년 일본의 잔혹한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다고 설명하며 이때부터 한국의 젊은 청년들이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했다.

최영숙은 1928년 1월 스톨혹름에서 열린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 정기회의’에도 참석했다. “세계평화를 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윤리적 요인들의 중요성”을 다룬 회의다. 페미니스트 마리 쉽생크스(1872~1960) 등을 만났다. 인도 여성 독립운동가 사로지니 나이두(1879~1949)와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귀국길에 4개월간 체류하며 마하트마 간디의 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때 인도 청년과 연인이 됐다.

이효진은 “최영숙은 한국인으로서 스웨덴 사회에 깊숙이 침투해 개인으로서의 학업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 황실 및 학자들, 중국대사들 등 사회의 유력인사들과 교류하며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어두운 시기 한국의 비공식 대사의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한다. e메일 답변에선 “최영숙은 아마 스웨덴 사람들은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했던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를 소개하고 보여주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문화대사와 같은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본다”고 말했다.

#최영숙의 스웨덴 행 이유와 황태자 도서관 근무 사실 여부는.

최영숙이 중국 남경 명덕 학이교와 회문여자학교를 거쳐 스웨덴 유학길에 오른 건 1926년이다. 왜 스웨덴이었을까? 최영숙이 스웨덴 작가 엘렌 케이(1849~1926)에게 감화받은 일은 알려져 있다. 엘렌 케이는 여성 참정권, 자유연애를 주장한 페미니스트였다. 당시 동아시아 신여성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엘렌 케이 아카이브’는 최영숙이 엘렌 케이에게 세차례 보낸 편지와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

최영숙은 중국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문학과 사회과학에 관심 많은 조선인 소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엘렌 케이에게 “모국어 이외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쓰고 말할 수 있다”면서 외국인에게 스웨덴어를 가르치는 기관이 있는지 물었다. 1년 학비, 숙박비 등도 물었다. 세 번째 편지에는 “어떤 이는 저에게 졸업하고 나면 미국으로 가라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편하게 지내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며 차라리 제가 가고 싶은 여사님이 있는 곳에서 고통받고자 합니다”라고 적었다. 이효진은 엘렌 케이가 최영숙의 편지를 받았을 수 있으나 병중이라 답장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최영숙 보증인으로 엘사 베르나도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스웨덴 왕자 오스카 베르나도트(1859~1953)와 에바 문크(1858~1946)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웨덴 왕실 공주다. 1925년 일본에서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갔다. 엘사 베르나도트는 1925년부터 1943년까지 여성 기독교 단체 K.F.U.K(스웨덴의 YWCA, 즉 기독교청년여성협회다) 대표로 일했다. 1925년 두 사람은 상하이에 있었지만 서로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이효진은 엘사 베르나도트의 보증 편지 (1926년 8월 28일자, 출처: 시그투나스티프텔센 도서관 아카이브)도 찾았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 스웨덴 사업기와 한국의 영국인 여성 의료 선교사의 추천서를 갖고 입학을 타진했다고 적었다.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달 동안 그녀는 어떤 수업도 듣지 않았지만 스스로 충분히 스웨덴어를 익혔습니다”라고 적었다.

최영숙은 1927년과 1928년에 스톡홀름에 있는 K.F.U.K 중앙지부에서 머물렀다. 한국에선 최영숙이 황태자 구스타프 6세의 도서실에서 일했다는 말도 퍼져 있다.

이효진은 스웨덴의 이 도서관을 직접 찾아가 직원 목록을 확인했지만, 최영숙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한국의 야생 동물지>를 낸 스웨덴 동물학자 스텐 베리만(1895~1975)이 최영숙을 스톡홀름 박물관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고, 황태자 도서실에서 동양 서류 정리 관련 일로 얼마 동안 있었다고 증언한 점을 두고 “단기나 보조로서 근무를 했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효진은 “엘사 세데그렌이 최영숙을 아시아 유물에 관심이 많았던 황태자에게 소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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