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기다릴 것인가, 리더십을 만들 것인가

2025-02-03

수술대 위에 오른 한국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세계 경제와 외교 무대에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주요 7개국(G7)이 눈앞에 잡힐 듯했다. 반도체·배터리·방위산업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며 한국 경제의 핵심 성장 동력이 됐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K-컬처의 위상을 한층 끌어올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던 순간, 한국은 전례 없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수술대 위에 올랐다.

겉으로 보기엔 외상도 없고 의식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충격을 받은 상태다. 계엄령 선포와 탄핵소추는 뇌진탕과 같이 국가 시스템을 강타했고, 마치 전두엽 손상을 입은 환자처럼 도덕성과 합리성이 흐려지고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대응이 난무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법치의 예측 가능성이 위협받고 있으며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사실처럼 퍼지면서 신뢰의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불확실성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국을 예의주시하고 있고, 향후 행보에 대한 우려를 보내고 있다. 수술을 시작할 골든타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전두엽 손상 환자처럼 극단 대응 난무, 합리성·도덕성 회복해야

경제안보는 최우선 방어선…법치와 동맹을 지켜야 신뢰 되찾아

‘개구리 임금님’과 ‘반지의 제왕’의 교훈, 절대 권력 환상 버려야

위기 극복 위해선 응급처방 아니라 근본적 시스템 개혁 필요해

이제 질문이 남는다. 이 수술을 집도할 명의는 누구인가? 그러나 명확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행정부는 공백 상태에 있고, 입법부는 극단적 대립으로 타협의 여지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사법부는 보수와 진보 양극단에서 강한 압력을 받고 있다. 결국 이 수술을 집도할 사람은 우리 국민 자신이다. 한국이 이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스스로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세 가지 방어선: 경제안보·법치·동맹

첫 번째 방어선은 경제안보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를 지켜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경제안보는 생존의 최우선 조건이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보호주의에도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한국은 아직 강력한 레버리지를 갖고 있다.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제조업이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조선·방위산업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유럽은 한국의 반도체와 배터리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 역시 한국과의 경제적 연계를 쉽게 끊을 수 없는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도 지속적인 위기 대응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관이 공조하는 초당적 경제안보 비상체제의 가동이다. 국회와 기업, 에너지·산업·금융 민간 전문가들이 외교·통상 정책 실무자들과 협력해 한국 경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정쟁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경제안보에 전문성을 지니는 국회의원들과 전문가들의 인력풀을 충분히 가동해야 한다.

두 번째 방어선은 법치다. 사법부는 삼권분립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법치가 무너지면 경제와 외교도 함께 붕괴한다.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한국의 국가 신뢰도는 급락할 것이며 이는 외국 투자자들의 철수와 외교적 고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치주의를 회복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헌법재판소·대법원·검찰 등이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또한 절차적 정당성을 회복하기 위해 주요 재판들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탄핵 심판과 내란죄 재판, 주요 정치인들의 재판 과정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변질되지 않도록 철저한 감시와 균형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어선은 동맹이다. 위기 상황에서는 새로운 것을 무리하게 하기보다 기존의 것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지난 몇 년간 구축한 한·미 동맹, 한·일 협력, 한·미·일 파트너십, 나토-인도태평양 협력(NATO+IP4) 및 핵협의그룹(NCG)과 같은 외교적 성과는 실제로 한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지탱하는 주요한 자산이고 활용해야 할 카드다. 이를 유용하게 활용하면서 추가적인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 진영을 바꿔야 균형이 잡힌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동맹이 견고한 만큼 한국의 외교적 자율성이 커지고, 전략적 선택의 폭도 넓어진다.

트럼프 행정부가 외교관계를 ‘거래’의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기존의 동맹 개념이 위축되고 각자도생의 파편화된 국제질서가 도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래의 성격이 강해질수록 중요한 것은 협상력이다. 한국에 ‘각자도생’이란 홀로서기가 아니라 기존 동맹과 우방국들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관리하면서 독립적인 외교적 공간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 및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를 최대한 유리한 조건에서 재정립할 기회가 생긴다.

버려야 할 환상: 영웅은 오지 않는다

위기가 깊어질수록 대중은 강한 지도자를 찾는다. 혼란 속에서 질서를 확립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믿음은 위기 시대의 대중 심리를 반영한다. 하지만 강한 지도자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은 가장 위험한 착각일 수 있다. 정치 지도자는 자신이 국가를 구원할 영웅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고 대중은 이러한 지도자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역사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할 때마다 그들이 가져온 결과가 반드시 긍정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개구리 임금님’의 이솝우화는 정치의 역설을 보여준다. 무정부 상태를 견디지 못한 개구리들은 제우스 신에게 왕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제우스는 처음에 통나무 왕을 내려줬고 개구리들은 왕이 무능하다는 불만을 품었다. 결국 더 강한 왕을 원한 개구리들은 물뱀을 받았고 그 물뱀은 개구리들을 하나씩 잡아먹었다. 그동안 우리는 통나무 왕을 버리고 더 강한 스트롱맨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반지의 제왕』에서도 절대 반지는 강력한 힘을 제공하지만 그것을 소유하려는 자는 결국 타락했다. 사우론·골룸·사루만 모두 절대 반지를 탐했고 결국 자신의 욕망에 의해 파멸했다. 반면 프로도와 간달프는 절대 반지를 거부하고 절제와 지혜로 그 반지를 파괴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절대 반지를 손에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을 경계하고 자율적인 시스템을 존중하는 인물이다.

오늘날에도 트럼프·푸틴·시진핑 같은 지도자들은 각국에서 스트롱맨 정치의 부활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도 그 길을 따라갈 것인가? 강대국의 절대권력자에 맞서 상대적으로 소국인 한국이 힘 대 힘으로 맞선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오히려 기민하고 유연한 리더십이다. 절대권력 반지의 주인이 아니라 세계 경제 10위, 군사력 5위, 그리고 새로운 문화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위상에 걸맞은 기본적인 품위와 도덕성을 갖춘 리더십이 사회 각 분야의 전문성을 조율해 내면 된다.

변혁의 시간에서 한국은 영웅 같은 지도자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리더십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극단적 진영 논리를 넘어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하고, 국가 개입보다 기업과 민간이 주도하는 성장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자가 아니라 조율자로서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한국의 선택: 생존과 재건

한국은 지금 거대한 격변의 한가운데 있다. 이번 위기가 단순한 정치적 대립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자체의 기능 장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냉철하게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위기가 곧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이미 여러 차례 중대한 위기 속에서도 강한 회복력을 보여왔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하며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강한 경제적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단순한 정치적 도전이 아니라 경제·법치·외교가 동시에 흔들리는 복합적 위기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응급처치가 아니라 근본적인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다. 뒤로 돌아갈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정치적 대립이 계속된다면 한국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것이고 경제적 몰락과 외교적 고립, 민주주의 후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경제와 법치를 지키고 실용적인 리더십을 만들어 낸다면 이 위기는 과거를 넘어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역사는 선택의 순간에 머뭇거리는 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국은 이제 생존을 넘어 재건의 길로 가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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