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라는 공통의 화두를 앞에 두고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들이 서울에 모였다. 흔들리는 서구 민주주의, 강화되는 국가 개입, 기술혁신과 불평등이 교차하는 시대에 동아시아는 이 전환의 국면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지난 11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제20차 한중거버넌스포럼’에서 한중 양국의 학자들은 ‘동아시아 지역 거버넌스의 이론과 정책’을 주제로 각자의 정치 현실 속에서 거버넌스의 의미와 방향을 다시 짚어 보았다. 민주주의와 통치, 시민과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회의장에서 교차했다.

2005년 시작된 ‘한중거버넌스포럼’은 올해로 20년을 맞이한다. 이번 포럼에는 이희옥 성균중국연구소장을 비롯해 마인섭 성균관대 명예교수(전 부총장), 안재흥 아주대 명예교수 등 한국 측 원로 정치학자들이 참석했다. 중국측에서는 왕푸취(王浦劬) 베이징대 국가 거버넌스 연구원 원장, 옌지룽(燕继荣) 정부관리학원 원장, 저우광후이(周光辉) 지린대 교수, 퉁더즈(佟德志) 톈진사범대 부총장 등 ‘장강학자’ 4인이 방한해 발표에 나섰다.

▶이희옥교수 “포스트 휴먼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국가의 역할 성찰해야”
개회사를 맡은 이희옥 성균중국연구소장은 “거버넌스 포럼이라는 명칭 자체가 도시와 농촌, 민주주의와 국가, 그리고 거버넌스 현대화 등 폭넓은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며“ 한중 포럼을 꾸준히 이어오면서 동아시아적 시각을 유지하고자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그는“한중 학자들은 서로 다른 정치문화 속에서도 정치는 왜 존재하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해왔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치가 최근 ‘소용돌이의 정치’ 속에서도 회복 탄력성을 보여주었지만 관용과 절제, 다름을 인정하는 문화는 약화되고 있다”며 “정치학 연구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또 지난주 방문한 중국의 상하이와 항저우 혁신지역 경험을 언급하며 “중국은 갈 때마다 변화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포스트 휴먼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국가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이빙 대사 “중국식 거버넌스는 뿌리 깊은 제도”
주한중국대사 다이빙(戴兵)은 이날 축사를 통해“중국의 국가 제도와 거버넌스 체계는 자국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둔 것으로 외부 강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14억 인구와 복잡한 민족구성과 국제 환경 속에서 유례없는 통치 과제를 안고 있지만 개혁개방 이후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고 강조했다. 또 “각국은 고유한 역사와 문화, 발전 단계에 따라 제도를 선택해야 하며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진영 논리는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한 관계에 대해 “양국은 유교문화권이라는 공통적 배경과 유사한 발전 경로를 지녔기에 거버넌스 이념과 정책 실천에 있어 상호 교류 가능성이 크다”며 “국제사회의 다자주의와 자유무역, 유엔 중심의 국제 질서를 함께 수호하고 인류 운명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인섭 교수 “민주주의의 정체와 퇴행, 구조적 변화 필요”
성균관대 명예교수 마인섭 전 부총장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맞고 있는 위기를 진단했다. 그는“1945년 이후 번영을 거듭해온 민주주의가 최근 10~20년 사이 정체 또는 퇴행의 흐름을 보인다”며 “이 위기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라고 분석했다.
그는“미국과 한국 모두 선출되지 않은 권력, 예컨대 사법부나 헌법기관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된다”고 덧붙였다.
마 교수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시민의 정치적 역량, 윤리적 교육과 정체성 정치를 둘러싼 문제들을 다층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며 “학계가 오랜 시간 연구해온 좋은 민주주의의 요건들인 참여·경쟁·책임·대응성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학문적, 정책적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왕취푸 원장 “중국 통합형 거버넌스로 공정성과 효율 동시 추구”
왕취푸 베이징대 국가 거버넌스 연구원 원장은 “중국은 시장경제가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문제들에 직면해 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전체 계획’과 ‘정치적 조정’을 강화해 왔다”며 “2012년 이후 국가의 직접적 개입과 조율이 강화됐고 이러한 흐름은 신시대 중국의 거버넌스 핵심 기조”라고 설명했다.
또한 “개혁개방은 효율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동시에 사회적 형평성과 질서, 신뢰 회복이라는 과제도 함께 남겼다”며 “중국은 기술 혁신을 동력으로 삼되 신뢰와 공정이 뒷받침되는 제도적 설계를 통해 이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옌지룽 원장 “아시아식 ‘민주적 거버넌스’가 대안 될 수 있어”
베이징대 정부관리학원 원장 옌지룽은 “서구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지만 중국은 거버넌스 개혁을 통해 경제 발전과 국가 현대화를 동시에 달성했다”며 “아시아 국가들이 제시하는 민주-거버넌스 결합 모델이 새로운 발전 방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이상적 정치체제로 간주하던 시기는 지났으며 한국을 포함한 민주국가들도 제도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중국은 2012년 이후‘개발 주도 개혁’에서 ‘거버넌스 중심 개혁’으로 전환하며 전 과정 민주제, 사회 협의, 시민 교육 등을 통해 새로운 모델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민주주의와 거버넌스 발전은 상호 긴밀히 연결돼 있으며 이를 시장·사회·정부라는 구조 속에서 통합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며 “중국은 폐쇄적 계획경제를 버리고 산업화·시장화·세계화를 추진하며 제도적 혁신을 지속해왔다”고 강조했다.
▶안재흥 교수 “민주주의 위기, 공자의 예치원리로 해법 모색해야”
안재흥 아주대학교 명예교수는 “오늘날 세계는 포퓰리즘, 정서적 양극화, 정체성 정치, 내셔널리즘의 확산 등으로 인해 이념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다”며 “이는 기존의 정치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유교 경전인 『논어』를 통해 현대 서구 정치적 이론을 재해석했다. “공자는 협력에는 협력으로, 배반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다시 협력의 관계로 회복할 수 있도록 용서의 덕목을 강조했다”며 “이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이 아니라 공동체 내 신뢰 회복과 지속적 협력을 위한 정치적 전략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오늘날 거버넌스는 통치(government)의 대체물이 됐지만 이후 사라진 ‘법’(法)과 ‘예’(禮)를 복원하지 않고는 지속 가능한 정치 질서를 만들 수 없다”며 “동아시아가 공유하는 유교 전통은 이러한 가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한중거버넌스포럼’이 20년의 세월 속에서 확인한 것은 하나다. 민주주의와 거버넌스는 더는 서구 이론의 수입품으로만 해석될 수 없으며 동아시아가 가진 사상적, 제도적 자산을 바탕으로 독자적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 그리고 복잡해진 국가의 시대, 스무 번째로 서울에서 열린 이 오래된 대화는 다음 20년을 위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리=김매화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