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했다고, 3월이 끝났다. 온 나라가 아프고 아침저녁으로 북풍이 남아 있는데 속없이 새로운 4월이다. 태생적 게으름으로 할 일만 태산이고 한 일은 미약하다. 감자 두둑이 곱게 늘어서고 고추 고랑을 다듬는 어머니들의 괭이질이 분주하지만 나는 텃밭 정리도 마치지 못했다. 나의 지지부진과 관계없이 형님들의 트랙터는 진흙을 하늘로 날리며 달리고 어르신들 논 한편에 내려앉은 못자리가 곱다. 여지 없이 씨나락을 준비할 시기다.
얼마 전 농업인 실용교육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올해는 좀 잘해보겠다’는 각오의 첫걸음이다. 100년 넘게 유행하는 연말연시 금연 각오랑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실현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농업기술원에서 연구하는 분은 수업을 시작하면서 의외의 얘기를 했다. “제가 지금 이 강의를 하는 게 맞나 싶네요. 사실 이러면 안 되는데.”
강의 제목은 ‘고품질 쌀 재배기술’이었지만 강의 내용은 쌀 생산 감축의 필요성이었다. 쌀 소비량이 감소했고, 재배 면적 감축 없이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매년 10%의 쌀이 남으니 경작 면적을 그만큼 줄여서 시장의 수요·공급을 맞추겠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중에서 내년부터 재배 면적을 강제로 축소 조정하겠다는 건 충격적이었다. 강의에서 할 얘기가 아니었다.
쌀을 줄이라는 정부 계획에 잘 따르면 쌀을 먼저 사주겠다고 했다. 타 작목으로 전환하는 농민에게 지원을 확대하고 콩이나 축산용 사료를 생산하는 단지를 늘리겠다는 계획도 설명했다. 대책이라기보다는 채찍을 감춘 유혹이었다. 농업전문가나 시민단체들도 강압적인 과정을 문제 삼을 뿐, 취지와 내용은 인정하는 분위기다. 시장에서 수요를 무시한 공급을 주장할 수만은 없다. 문제는 식량을 시장의 논리로만 해결하려는 생각이다. 식량은 모자란다고 즉시 수입하고 남는다고 쉽게 수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필리핀의 상징은 논과 쌀이었다. 가파른 계단식 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명실상부 아시아의 농업 선진국이었다. 그곳에 구조조정이 시작됐고 서비스업과 금융산업에 지원이 몰렸다. 필리핀 논 면적의 3분의 1이 사라지고 사탕수수와 코코넛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부가가치가 쌀보다 높기 때문이다. 쌀 소비량의 92%를 생산하고 나머지 8%를 수입했지만 그 수입량에 문제가 생기면서 파동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정부청사 앞에서 장사진을 이뤄 쌀을 배급받는다. 농사를 짓던 나이 든 농민은 관광객 앞에서 춤을 춰야 하고, 젊은 농민은 부업을 찾아다닌다. 쌀 수출국에서 최대 쌀 수입국으로 바뀌는 데 몇년 걸리지 않았다.
쌀에 진심이라는 일본도 쌀 가격 폭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해 쌀 사재기가 있었고 쌀값이 70%나 뛰었다. 우리나라도 주곡인 쌀에 문제가 생기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밀가루값 폭등과는 파괴력이 다를 것이다. 수출 규제가 쉽고 가격 횡포가 심한 곡물 시장은 대응하기 어렵다. ‘식량안보’라는 말이 괜히 있겠나. 전쟁 때문에 식량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식량 때문에 전쟁이 나기도 한다.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세상 쉬운 건 정부의 대책뿐인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