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쯤 됐나보다. 불혹을 넘겼다고 나도 모르게 20∼30대 후배들을 ‘요즘 애들’이라 부르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산책을 하던 중 어느 식당 간판에 적힌 ‘부뚜막’이 화제에 올랐다. 한 후배가 되물었다. “부뚜막이요? 굴뚝 비슷한 거 아닌가요?” 다른 후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얌전한 고양이 어쩌고 하는 속담은 들어봤는데….” 또 다른 후배가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열고 읊었다. “국어사전엔 ‘아궁이 위에 솥을 걸어 놓는 언저리’라는데…, 아궁이가 뭐죠?” 그후로 최소 열명은 넘는 ‘요즘 애들’에게 부뚜막 테스트를 했지만 단 한명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 우리가 같은 시공간에 산다고 동시대인은 아니지.
모든 사람이 저마다 한권의 사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처음은 아닐 것이다. 나폴레옹도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요즘 애들은 ‘부뚜막’ 대신 내가 모르는 새로운 말들을 품고 있겠지. 또 같은 ‘부뚜막’이라도 사전마다 설명의 양과 질은 다를 것이다. 얄팍한 상식 수준인 내 사전과 달리, 내 조부모님 사전엔 섬세한 뜻풀이와 구성진 예문에 갖가지 색깔과 심지어 구수한 냄새까지 나는 최첨단 공감각 참고자료가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태어날 때 백지였던 나라는 사전에 맨 처음 ‘맘마’ ‘까까’ ‘지지’ ‘에비’ 같은 생존 필수 어휘를 새겨준 이는 부모님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내 사전의 ‘벚꽃’ ‘설렘’ ‘첫눈’ ‘눈물’ 같은 표제어의 예문이 ‘그 사람’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 싣는 단어수는 줄어들지만 오래전 실린 단어를 들춰보는 일은 잦아진다. ‘할매’ ‘언덕’ ‘염소’ ‘우물’ 같은 그리운 말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곧 가정의 달 5월이다. 챙겨야 할 날, 챙겨야 할 사람이 달력에 빼곡하다. 어른은 어린이를, 자식은 부모를, 부부는 서로를, 그러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을 이날 하루만이 아니라 일년 내내 아끼고 섬기라는 당부다. 하지만 가까운데도, 아니 가깝기 때문에 자주 삐걱대고 틀어지는 관계가 가족이다. 이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저 말이 튀어나가 부모 눈에 눈물이 흐르게도 하고, 찰떡같이 말했는데 개떡같이 알아듣는 배우자 때문에 뒷목을 잡기도 한다.
이 불통을 뚫고 소통을 하려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해야 하리라. 우리는 서로 다르다, 너와 나는 말하자면 표제어가 많이 다르거나 설령 같더라도 뜻풀이가 서로 다른 사전이다, 내 사전에 실린 ‘부부의 날’엔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즐긴 후 깜짝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지만 당신 사전엔 “장미 한송이로 퉁치는 날”이라 돼 있나보다, 우리가 안 통하는 건 상대를 배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렇듯 서로 다른 사전이기 때문이다….
천성 탓인지 직업 때문인지 몰라도 사전을 자주 들춰본다. 세상에 말과 글로 내기 전에 정확한 뜻을 알고 싶고, 저렇게 뱉고 써도 되는지 남의 말과 글도 꼼꼼히 살핀다. 그 덕에 내 사전은 제법 충실해졌고 이제는 곧잘 남을 가르치려 든다. 그런데 가까운 이들의 사전에 내가 모르는 어떤 말이 실려 있는지 관심을 갖거나, 내 사전의 뜻풀이를 내려놓고 그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일에는 소홀했다. 지천명도 넘었으니 이젠 남의 사전도 열린 마음으로 들여다봐야겠다. 그 사전에 실린 뜻풀이의 문면(텍스트)뿐 아니라 문맥(콘텍스트)도 이해하려 노력해야겠다. 그래도 명백히 틀린 건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 같다.
손수정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