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창비교육, 2020)에 나는 ‘몰라서 좋아요’라는 시를 실었다. 청소년 시기의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보기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을 골라낼 줄 알고 삼각함수 문제를 풀 수도 있었지만, 친구의 의중을 파악하고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모르는 목소리/ 모르는 얼굴/ 모르는 맛/ 모르는 감정/ 모르는 내일// 모르는 것투성이이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만은 알아요// 몰라요/ 몰라서 좋아요”라는 구절에는 ‘모름’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애써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되면 궁금했던 것들이 상당 부분 해결될 거라 믿었다. 성장하면서 몰랐던 것을 자연히 알게 될 것임은 물론, 언젠가는 삶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경험이 자신감을 키워주고 상상력을 넓혀줄 거라 믿었다. 어려운 결정도 뚝딱뚝딱 내리고 “몰라서 좋아요”라는 말 대신 “알아서 좋아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목소리, 얼굴, 맛 등은 그때보다 많이 알게 되었지만, 감정이나 내일에 관해 물어보면 속 시원히 답변하기 어렵다. 감정이 복잡다단하고 내일이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오히려 더 주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몰라도 되는 것을 알게 될 때 삶은 흥미진진해진다. 굳이 비밀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기는 여간해서 힘들다. 여행의 즐거움을 체득한 사람은 머물고 있을 때조차 틈틈이 떠나는 일을 떠올린다. 우연히 접한 취미에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한 사람은 여가를 활용해 그것을 더 잘하고자 한다. 몰라도 되는 것이 알게 되어 기쁜 것이 된다. 한편, 풍요에 길들고 나면 부족한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비리를 알게 된 조직에 다시 발 들이기란 어렵다. 나를 환영하지 않는 자리에 선선히 깃드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알게 되니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하는 셈이다.
몰라도 되는 것이 실은 알아야 했던 것임을 깨달았을 때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것이 단순히 능력이나 소질을 뜻하지는 않는다. 행인이었던 누군가가 반려자가 되기도 하고 책 한 권과 영화 한 편이 사고 체계를 뒤흔들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알기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존재가 감정을 쥐락펴락하고 평생 믿어왔던 것을 뒤집어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시간도 거리도 무게도 다른 차원에 접어드는, 도량형이 무의미해지는 시간이다. 모름을 앎으로 바꾸려 애쓰는 시간이다. 어차피 모를 바에야 잘 모르기 위해 궁리하는 시간이다.
책장 옆에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탑을 이루고 있다. 꽉 찬 책장에 들어서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책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한다. 언젠가 엄마가 물은 적이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읽은 거야?” 때마침 책을 읽지는 않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을 놀림조로 이르는 단어인 ‘적독(積讀)’을 알게 된 직후였다. “아직은 모르는 것들이야. 알게 될 것들이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변명하듯 튀어나온 저 말이 이따금 떠오르는 걸 보니, 나는 확실히 모름의 상태를 긍정하기 시작한 듯하다.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알아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꺼운 것은 ‘몰라서 좋아요’의 마음이 ‘몰라도 좋아요’의 마음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아직은 몰라서 좋고 끝끝내 몰라도 좋다.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모르기 때문에 몸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몰라서 나는 나도 모르게 변화할 것이다. 알다시피 ‘모르다’에는 “매우 그러하다”라는 강조의 의미도 있다. 그래서일까. 몰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몰라도 얼마나 설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