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한문 선생님의 별명은 귀신이었다. 뒤돌아 칠판에 판서하면서도 졸거나 딴짓하는 학생을 정확히 호명하는 능력이 있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선생님들의 별명은 좀 살벌했다. 교련 선생님은 살모사, 체육 선생님은 미친개였다. 엄한 한문 선생님 덕분에 신문에 실린 한자 정도는 읽을 줄 알게 되었다. 미술 시간을 통해 형식적이나마 서예라는 것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그것마저도 다 사라졌다. 나는 중학교 시절의 그 짧은 한문 시간과 미술 시간의 소중함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 그런 공부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이 들어 이런저런 일로 중국을 가끔 다니고 있다. 박물관을 다니고 책을 사고 고완품 가게를 순례하는 여정이다. 중국에 가면 가게 간판을 보는 일이 무척 즐겁다. 대부분 행서체나 전서체로 쓴 손글씨들인데 그 솜씨에 놀라고 또 그 전통을 여전히 간직하는 문화가 부럽다. 특히 고완품 상점들의 간판은 일품이다. 뛰어난 서예가의 개성적인 솜씨를 만끽할 수 있다. 한자를 저마다 달리 개성적으로 밀고 나간 여러 자취를 보는 일은 단지 간판을 보는 일이 아니라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다름없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서예 전시장인 것이다.
서예 경험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불가피하다. 그것은 필력을 기르는 일이자 온몸의 감각과 힘을 실어나르며 자신만의 선을 추려내는 일이다. 누가 얼마나 자신만의 붓질을 해내느냐가 그림에서는 본질적인 문제다.
나는 이우환의 그림이 서예 그대로라고 본다. 그는 어린 시절 익힌 서예를 현대미술과 접목해 개성적인 그림을 만든 이다. 서예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한 이는 1930년대 김용준과 이태준이다. 이들은 문예지 ‘문장’을 통해 문인 취향을 강조하는 선비의 전통을 중시했다. ‘문장’의 제호도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사용했다. 문인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내건 김용준은 서(書)를 “예술의 극치”로 보고 시서화가 종합된 예술을 꿈꾸었다. 김용준은 유려한 붓놀림과 먹의 다양함을 통해 문인 수묵화의 전통과 선비적 정서를 부활시켜 계승하려 했고, 이러한 시도는 전통을 근대적으로 보이게 했다. 이태준은 특히 추사 김정희의 서예를 높이 평가하면서 당시 조선 미술계가 추사를 넘어서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상식적인 일반 통념을 완전히 벗어나 작자(作字)와 획(劃)을 해체하여 극히 높은 경지에서 재구성하는 것, 공간을 처리하는 예술적 구성, 그리고 고전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종횡무진으로 풍부한 변화를 갖는 예술적 창의력과 넓은 식견을 지닌 추사의 세계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깨우쳐준 진리였다. 근대 한국 조각의 효시인 김복진 역시 추사의 서예가 가진 힘에 주목했다. 김복진은 “서도는 조각의 어머니”라며 추사의 글씨는 그대로 조각의 원리고, 오세창의 전각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 뒤를 이은 조각가 김종영 역시 추사의 글씨는 그대로 조각의 원리라고 말했다.
중국에 머물다 한국에 오면 우리네 간판들의 폭력적인 부착과 획일적이고 멋대가리도 없고 서체의 필력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저 건조하고 황량한 문자들의 부유함이 내 삶의 공간을 무던히도 황폐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력적인 손의 흔적으로 기술된 한글과 한자 간판이 그리운 것이다. 조악한 캘리그래피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