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말기의 유학자 최치원은 경주 출신이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조기 유학을 갔다. 갈 바에는 과거에 급제하라는 아비의 명을 받들어 바늘로 자신을 찔러 잠을 쫓아가며 공부해서 벼슬길로 나아갔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을 써서 문장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혼란스럽던 당나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신라로 돌아온다. 그 귀국길에 읊은 시가 며칠 전 한·중 정상 국빈만찬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이 연설 도중에 인용한 ‘범해(泛海)’다. 인용구는 첫 시구로 “돛을 달아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에 나아가네”.
이 시구는 시 주석이 12년 전 박근혜 대통령 방중 시 인용한 것을 또 사용한 것이다. 그 정도로 최치원에 대한 중국인들의 깊은 사랑을 드러낸 것일까, 혹은 한·중의 역사에 인용할만한 옛 전거가 그렇게 적은 것일까.

청년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습득한 지식을 펼칠 포부로 파도를 헤치며 신라로 돌아왔지만 ‘세상이 말세가 되어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용납되지 못했으므로 외직으로 나갔다’라고 『삼국사기』 열전 편은 기록하고 있다. 비록 크게 출세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랬기에 많은 글을 남겼고 후대의 중국과 한국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자료가 부족한 공연 예술 분야에서도 최치원은 고마운 존재다. 화랑정신을 풍류도로 설명하며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고, ‘향악잡영오수’라는 시를 남겨 신라시대의 연희인 금환·월전·대면·속독·산예의 내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대부분 서역이나 중국을 거쳐 들어왔을 그 연희들을 당악이 아닌 향악(鄕樂)이라 이름 붙였듯, 이역의 문화가 신라화한 과정을 소중하게 여겼으리라.
당나라에도 신라에도 기댈 곳이 없었지만 후대까지 둘을 이어주었던 최치원의 정신이 21세기에도 이어지길 희망한다. 우정의 노력, 만리 밖 미·중까지 나아가길.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군계일학(群鷄一鶴)과 혜소(嵇紹)](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11/04/4b7fee4f-6138-4569-9487-ca53d7dc70c1.jpg)




![[김상미의감성엽서] 시인이 개구리가 무섭다니](https://img.segye.com/content/image/2025/11/04/2025110451864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