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춘렬 칼럼] 쌀·소고기 개방의 늪

2025-07-21

美 관세 무기로 농축산물 수입 압박

시한 열흘 앞두고도 내부 갈등·혼선

YS·MB 협상 실패 반면교사로 삼고

李 국익 중심 실용 진면목 보여줘야

1993년 12월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취임 9개월 만에 국민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당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타결로 쌀 시장 개방이 불가피해지자 YS가 후보 시절 내놓았던 ‘쌀 한 톨도 수입하지 않겠다’는 공약은 허언이 되고 말았다. 그는 16분간의 담화에서 사과와 죄송, 죄책감이라는 말을 20차례 가까이 되풀이했다. 성난 농심을 달래기 위해 문민정부 초대 총리인 황인성씨가 물러났고 농림수산부·상공부 장관도 경질됐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2008년 4월 취임 두 달 만에 한·미 소고기 협상을 덜컥 타결했다가 정치적 파산 위기에 빠졌다. 노무현정부가 10개월 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때 약속했던 조건을 이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MB정부는 광우병 우려에도 소의 연령을 불문하고 모든 부위의 수입을 허용하는 우를 범했다. 국민건강과 안전을 망각한 부실·졸속 협상이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촛불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MB는 광화문을 가득 메운 촛불을 보면서 수없이 자책했다고 한다. 한때 70%를 웃돌았던 지지율이 20% 안팎까지 곤두박질쳤고 120만명 이상이 탄핵청원에 서명했다. MB정부는 다시 협상에 나섰고 결국 30개월 미만 소고기만 수입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다시 쌀과 소고기 개방의 공포가 덮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월1일 25% 상호관세 부과를 예고하면서 농축산물 수입확대를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미 영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3개국과 관세협상을 타결했는데 어느 곳도 농산물 개방이 빠지지 않았다. 영국은 10% 기본관세를 유지하는 대신 농산물·소고기 시장을 개방했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은 관세부담이 종전보다 두 배가량 커졌는데도 각각 미 농산물 45억달러, 29억달러어치를 사들여야 했다. 애초 1호 협상 대상국이었던 일본이 쌀수입에 난색을 보이자 트럼프는 “버릇이 없다”는 거친 말로 몰아세운다.

한국의 처지도 다를 게 없다. 농업 개방이 아무리 고통을 수반하는 민감한 현안이라지만 마냥 미루다가는 일본처럼 협상 여건만 나빠질 공산이 크다. 당장 소고기 월령 제한은 방어하기 쉽지 않다. 세계에서 사실상 한국만 16년째 월령 제한을 고수하고 있고 일본과 중국, 대만도 5∼6년 전 규제를 풀었다. 미국이 2009년 동물성 사료사용을 금지한 이후 광우병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쌀 추가 개방도 묵살하기 어렵다. 쌀은 513%의 고율 관세를 적용하되 해마다 5% 관세로 40만8700t의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을 의무적으로 들여온다. 미국 쌀은 TRQ의 32.4%(13만t)인데 더 수입하려면 다른 나라들과 협의도 필요하다. 미국은 사과 등 과일 검역완화와 감자 등 유전자변형작물(LMO) 수입 허용도 종용하고 있다.

트럼프가 띄운 최후통첩 시한까지 열흘 남았는데 내부 갈등과 혼선이 불거지니 걱정스럽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얼마 전 “농산물도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며 일부 농산물을 양보할 뜻을 내비쳤다. 총리실과 부처들은 협의나 검토를 한 적이 없다며 펄쩍 뛴다. 농업인 단체들은 벌써 제2의 ‘광우병 촛불’ 운운하며 반발한다. 농어촌 지역구 출신 여당 의원들도 여 본부장을 불러 “과도한 양보로 우리 쌀·한우 농가가 피해를 봐선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YS와 MB 등 역대 정부의 농업협상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대내외 협상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부처 이견을 조율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해법을 찾는 게 급선무다. 국회와 농민 등 이해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상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의견 수렴절차도 밟아야 한다. 협상타결에 따른 이익과 손해를 분담하고 피해 농가를 보듬는 정교한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같은 퍼주기만 남발해서는 안 될 일이다. 농업 경쟁력을 키우는 혁신과 구조조정이 병행돼야 한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필요하면 (트럼프의) 가랑이 밑이라도 길 수 있지만 나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이제 ‘흑묘백묘’식 실용 노선의 진면목을 보여줄 때다.

주춘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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