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에서] 배추 겉핥기

2024-10-13

2019년 이맘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국내에선 여름철 이상기상으로 양상추값이 앙등한 상태였다.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양상추를 빼니 마니 갑론을박이 한창이던 그때,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 농장에선 양상추가 튼실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다. 국내로 반입되면 수급불안을 해소하는 데 보탬이 되겠지만 농민 정서와 복잡한 통관 절차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내수시장에 출하 중이라는 관계자의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9월 추석 연휴까지 이어진 폭염에 전 국민이 고통을 받았다. 사람이야 실내로 피신하거나 에어컨을 틀면 되지만 노지에서 땡볕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고랭지배추로선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이상고온은 출하량 급감으로 이어졌고 가격은 천정부지 뛰었다. 상당수 언론에선 “배춧잎 두장에 배추 한포기” “금배추 사태…‘김장 대란’ 오나” 등 자극적 문구로 현상의 겉만 핥았다.

피상적인 건 정부도 마찬가지다. 연휴 직후 9월19일∼10월10일 농림축산식품부가 낸 배추 수급 보도자료만 10건. 언론 대응자료(설명자료)를 포함하면 21건으로 하루 1건꼴이다. 수급에 대한 국민 오해를 바로잡고 정부가 긴박하게 대응 중임을 보여주고 싶은 뜻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용은 가을배추 조기출하를 위한 영양제 지원, 신선배추 수입 같은 단기 처방이 주류를 이뤘다.

배추값 급등의 근본 원인은 기후위기에 있다. 온난화는 호냉성 작물인 배추에 치명적이다. 최근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이 농촌진흥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30년대 고랭지배추 재배적합지는 조사 기준연도(2000∼2010년)의 61% 수준으로 줄다가 2050년대엔 3%, 2090년대엔 0.3%로 ‘재배 낭떠러지’에 떨어진다. 고랭지배추는 외신도 걱정하는 문제가 됐다. ‘로이터통신’은 9월초 “한국의 배추 품질·생산량이 기온상승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아 전통음식인 김치가 위기에 처했다”고 전했다. ‘기후변화’는 동아시아연구원이 최근 성인 남녀 1000여명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북핵’과 동등한 수준의 최대 위협 자리에 올랐다.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았다면 처방도 최소한 근본에 가까워야 한다. 해외 재배적지를 개발해 우리 기업·농가가 농사를 지어 유사시 국내 반입하도록 하는 것은 첫번째 방책일 수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가 밝힌 “배추 수급문제 해결방안으로 배추 해외농업개발이 대안으로 검토되고 있다”는 말은 그래서 주목된다.

해외농업개발은 국제정세를 많이 탄다. 농식품산업 해외 진출사업 예산이 지난해 110억원에서 올해 97억원, 내년 88억원(잠정)으로 2년 연속 줄어든 이유다. 농산물 시세가 하락하면 빠르게 식는 냄비 정서, 외국산 농산물 반입에 대한 농민 반감 또한 풀어야 할 숙제다.

두번째로 제안하는 근본 처방은 ‘북한’이다. 정치권이 남북한 ‘두 국가론’으로 시끄럽지만 농업분야가 남북교류 마중물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다. 북한 한랭지역에서 여름채소류를 계약재배 하게 한 후 쌀과 구상무역을 추진해 고랭지배추와 쌀의 수급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는 북한 경제 연구자들 사이에서 꽤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정부는 10일 “가을배추 생육에 좋은 기온이 지속되면서 10월 하순으로 갈수록 공급량이 큰폭으로 늘 것”이라고 했다. 시세가 내리면 문제의 근본 원인과 해법이 또다시 잊힐까 걱정스럽다.

김소영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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