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윤의어느날] 어여삐 여기는 마음

2025-04-08

학교 본관 구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는 유난히 크고 느렸다. 그래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통유리 구조인 데다 사람이 적어 나는 학교에 갈 때마다 그것을 이용하곤 했다. 햇빛 그득한 유리벽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구동음과 함께 위로 천천히 솟구치다 보면 지난주보다 조금 더 푸르고 지난달보다 한결 풍성해진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에는 새둥지를, 겨울에는 눈 뭉치를 머리에 이고 있는 나무들이었다.

올해는 여름이 이르게 시작된다고 했으니 5월이면 벌써 더우려나. 곧 온실처럼 달궈질 한여름 유리벽을 떠올리고 있는데 학생 셋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대학영어 교재를 들고 있는 폼이 올해 신입생인 모양이었다. “너 오늘 공부할 거야?” 목소리 하나가 물었다. 내려야 할 층에 다다라 나는 문앞으로 옮겨 숫자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목소리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공부하기에 난 오늘 너무 이쁘고 신이 나는데?”

확신에 찬 목소리가 유독 환하고 선명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셋 중 누구일까. 나는 조금 전 스친 인상들을 머릿속에서 더듬어보다 그만두었다. 누구 하나가 아니라 셋 모두일 것 같아서였다. 누군가는 예쁘고 누군가는 신이 나고 누군가는 끝끝내 다정하겠지. 유리벽 너머 나무들보다 몇 배는 푸르고 풍성한 무언가가 엘리베이터 안에 그득 찬 것 같았다. 거기서 내려 상대적으로 어둑하고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나는 신이 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신이 나는 데다 자신이 너무 예뻐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거듭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예쁜 부분은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는데 어쩐 일인지 그 안에 나를 대입하면 생각이 뚝 끊겼다. 나를 어여삐 여긴 게 언제였더라? 신나는 마음으로 뭘 할까 고민했던 적은 또 언제였지? 기억을 아무리 되짚어도 멈추는 구간이 없었다. 내 안의 나는 늘 허둥대고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오늘의 일을 가까스로 끝내고 내일의 일을 추려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일과가 그리 신나지도 않았다. 나는 매일 나를 건너뛰는 데 열심이었다. 하루종일 애써서 할 일을 끝냈다면 조금쯤 기특해해도 좋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숨 죽은 베개처럼 일과 저편으로 떠밀려났다. 남다른 각오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자꾸 잊는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에 자꾸만 옹색해진다.

나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나를 존중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신나고 설레는 마음을 헤아리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의 나는 눈 밑이 까맣고 시무룩하니 맛있는 것을 먹여볼까. 향이 진하고 고소한 커피와 피낭시에를 곁들이면 즐거운 마음 정도는 들겠지. 책에 밑줄을 실컷 그으며 무르고 진한 연필심으로 노트 한 편에 좋아하는 구절들을 옮겨 적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늘의 나를 다독여 내일로 넘어가면, 내일의 나는 적어도 오늘보다 예쁘고 신이 나지 않을까. 나는 강의실에 다다를 때까지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이름 모를 학생들에게 배운 말을 주문처럼 외워보는 것이다. 오늘의 내가 너무 예뻐서.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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