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리창 중국 총리가 미국 재계와 학계 인사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미중 관계를 ‘다툼이 있더라도 결국은 서로가 필요한 부부 사이’에 비유했다고 보도했다.

WSJ은 과거 중국 지도자들이 미중 관계를 부부 사이에 비유하곤 했으나 양국 관계가 노골적인 경쟁 일변도로 치닫는 최근에는 볼 수 없게 된 표현이라며, 중국이 미국과 관계 회복을 희망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 ‘부부론’이 은퇴한 중국의 한 최고위급 지도자를 연상시킨다는 분석들이 흘러나왔다. 왕양(汪洋·70) 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정협) 주석 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미중관계 부부론’은 2013년 갓 부총리에 오른 왕양이 워싱턴 미중 경제회의에서 처음 언급한 용어다. 1기 시진핑 정부가 막 출범한 때였다. 국가주석에 오른 시진핑은 이른바 신형대국관계를 내세우며 ‘중국과 미국이 태평양을 동서로 나눠 상호 공존하자’는 메시지였다. 마오쩌둥에 이어 두 번째 실권자가 된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실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림)’ 외교 기조의 연장선상에 있던 취지였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중국의 경제 압박 강도가 은근히 높아져 갔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무역 전쟁으로 중국을 손봐 주기로 결정했다.
2018년 출범한 2기 시진핑 정부는 중국에 비타협적이던 서방 국가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전랑(戰狼·늑대 전사) 외교’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번 리창 총리의 방미 중 발언은 여러모로 중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회자했다. 중국 관례상 권력에서 밀려난 지도자는 그의 발언이나 정책에 관한 언급이 금기시된다. 그래서 리창이 미국 정·재계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왕양의 ‘부부론’을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이번 리창 총리의 공식 유엔 연설은 평이했다. 그는 평화 발전, 국제 정의, 다자주의, 보호무역 반대 등 중국 정부의 기존 입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데 그쳤다. 건질 만한 알맹이는 이 비공식 행사에서 나온 ‘부부론’이었다.
리창 발언의 배경을 두고 몇 가지 해석이 나왔다. 우선 강경 일변도였던 중국의 대미 외교가 과거의 유화적 노선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강경 외교가 3기 시진핑 정권의 외교 외교 정책 기조였다는 점에서, 정책 주도권이 다른 인물에게 넘어가고 있을 가능성도 점쳐졌다.

국내 정치적 관점의 해석도 나왔다. AP통신은 ‘한 걸음 물러선 시진핑, 유엔 회의에 측근 내세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시진핑이 해외 활동을 줄이고, 핵심 측근에게 업무를 위임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했다. AP는 2015년과 2020년 유엔 회의에 각각 직접·화상으로 참석했던 시진핑이 “올해는 리창 총리에게 자리를 맡겼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
AP는 또 전문가들을 인용해 “시진핑은 국제무대 전면에서 한발 물러나 리창 총리에게 역할을 맡기고 있다”며 “이는 권력 이양이 아니라 충성파에게 집행을 맡기는 ‘위임 통치’에 가깝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라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화권 매체들에 의해 차기 시진핑 후보군 중 하나로 거론되는 권력 이상설과 관련해 후계자 후보군에 올라 있는 인물이 왕양이다.
왕양은 누구인가. 그는 한때 공산당 3대 파벌 중 하나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고위 간부 출신으로 구성된 퇀파이(團派)의 핵심 인사로 불렸다. 그 자신이 공청단 출신은 아니었지만 시진핑의 전임 후진타오 전 주석이 리커창 전 총리를 후계자로 앉히는 데 실패한 이후 후진타오와 퇀파이의 지지 속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시진핑 1기 때 부총리, 2기 때 공산당 최고 권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입성하고 권력 서열 4위로 평가받는 전국정협 주석에 선출됐다. 개혁개방의 첨병 광둥성 당 서기 등을 역임하며 덩샤오핑이 확립한 개혁개방 노선을 충실히 이어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시진핑이 덩샤오핑이 설정한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원칙을 깨고 20차 당대회(2022년 10월)에서 3연임에 성공하자 왕양은 전국정협 주석직을 내려놓고 정치적 은퇴 수순을 밟았다. 시진핑은 제도적으로 당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주요 보직을 최측근들로 채웠다.
이렇게 강고한 시진핑 체제에 대해 올해 들어 물음표가 하나둘씩 제기됐다. 지난 6월 말 관영 신화통신은 시진핑이 ‘당 중앙 의사결정 조정기구’를 설립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두고 덩샤오핑이 확립했던 집단지도체제의 부활이라거나, 중국 내부에서 권력 분산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해석들이 나왔다.

이 기구 설립이 후진타오 등 당 원로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고 왕양이 대표를 맡게 될 것이라는 내부 소식통의 전언도 흘러나왔다. 이번 리창의 미중관계 부부론 발언과 맞물리는 지점이다. 왕양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중국 내 여러 의사결정 분야에서 시진핑의 권한이 위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왕양이 공식적으로 은퇴한 상태지만 시진핑에겐 ‘왕양은 자신을 지켜줄 것’이란 신뢰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왕양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있는 동안 시진핑에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왔다. 군부 실세 장유샤(張又俠)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공식 석상에서 시진핑과 반목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당내 권력투쟁에 대한 긴장도는 높아지는 분위기다. 시진핑으로선 왕양 같은 인물에 무게를 실어줄 필요를 느낄 법하다.
10월 20~23일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4중전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번 회의에선 당의 발전 방향과 주요 인사 결정은 물론, 시진핑이 장악한 권력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가늠할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