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뜻깊게

2024-11-11

#가끔: 시간·공간 간격이 얼마쯤씩 있게.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해 깐깐한 심사평으로 화제를 모은 안성재 셰프. 그가 서브웨이 광고에 나와 안창살 샌드위치 맛을 평가한 뒤 이렇게 말한다. “프랜차이즈에서 만든 샌드위치치고는 꽤나 만족스러운 것 같습니다.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퀄리티면 가끔 가서 먹을 것 같아요.” 미쉐린 레스토랑의 ‘파인 다이닝’ 같다고 하지 않았다. ‘프랜차이즈 샌드위치치고는’ 괜찮다고 했다. ‘매일’ 먹고 싶다고 하는 대신 ‘가끔’ 먹을 것 같다고 했다. 안 셰프의 솔직한 표현 역시 광고 전략이겠지만 아무튼 대박을 쳤다. 일주일 만에 유튜브에서 143만 뷰를 기록했다.

안성재 셰프의 “가끔 먹을 것” 광고

피감기관 인사말 “뜻깊게” 인상적

향후 국정 운영도 그렇게 했으면

#뜻깊다: (일이나 행동이) 지니는 가치나 의의가 높다.

국회의원들의 의례적 표현인 ‘존경하는’만큼은 아니지만 ‘뜻깊게’라는 말도 국회에서 꽤 자주 쓰인다. 특히 국정감사나 상임위에서 정부 기관장이 국회에 업무보고를 할 때 거의 관행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식이다. “오늘 존경하는 ○○○ 위원장님과 ○○위원회 위원님들을 모시고 국정감사를 받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이번 국감에서도 피감기관장들은 ‘뜻깊게’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했다. 국감은 헌법과 법률에 따른 국회의 마땅한 업무지만 피감기관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날카로운 질문에 긴장하고, 때로는 고성과 막말에 시달리며, 함량 떨어지는 질의에 실소(失笑)를 참아가며 표정 관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국감과 국회를 어떻게 표현할지 오랜 고민 끝에 나온 단어가 ‘뜻깊게’일 게다. ‘기쁘게’ 국감을 받겠다면 과공이고 ‘부담스럽게’라고 하면 국민 대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국회의 권능을 높이는 중립적 맞춤 표현을 감각 있는 공무원 누군가가 찾아냈고 다들 베껴 쓴다.

#국정농단: ‘국정농단’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안 나온다. 국정(國政)은 나라의 정치, 농단(壟斷)은 이익이나 권리를 독점하는 것이다. 나라 정치를 틀어쥐고 이익·권리를 독점하는 게 국정농단이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을 도와서 선거도 좀 잘 치르고 국정도 원만하게 잘하길 바라는 일들을 국정농단이라고 한다면 그건 국어사전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떤 이가 국립국어원 게시판에 질문을 올렸다. 헌법상 아무 권한이 없는 대통령 부인이 선거와 국정에 개입하려 했다면 그걸 국정농단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 나흘 만에야 답이 올라왔다. “답변드리기 어렵다.”

대통령 발언은 결국 김 여사의 행위가 국정농단이 아니라는 것이니, 국어사전 새로 쓸 필요는 없다. 한데 대통령 설명대로 김 여사가 육영수 여사처럼 ‘청와대 야당’ 노릇을 하며 시중 여론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아내의 조언을 한 것뿐이라면 야당이 주장하는 특검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있을까. 김 여사를 두둔하느라 대통령이 국어사전까지 거론하는 바람에 엉뚱하게 국립국어원이 곤욕을 치렀다.

대통령 기자회견 이후 실망한 이가 많다. 이젠 더 볼 것 없다는 말까지 들린다. 그래도 국정은 돌아가야 한다. 지금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책이 정무적인 판단에 과도하게 휩쓸리지 않도록 부처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방패막이 돼주는 것이다. 지지율 올리자고 당장 달콤한 정책을 권하는 이들은 경계해야 한다. 공매도 금지처럼 담당 부처조차 반대하는 정책은 다시 나오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은 최근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연금·노동·교육·의료 등 4대 개혁을 임기 내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단단한 틀을 만들어 다음 정권에서 마무리지을 수 있게끔 하겠다”고 밝혔다. 다 잘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경제 원리를 거스르지 말고 경제 주체의 자유를 신장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으면 한다. 정치는 모르겠고 정책이라도 제대로 좀 해 달라. 가끔은 뜻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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