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80년을 기념하는 해다. 지난해 12월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3만5563달러를 기록해 일본(3만3849달러)을 앞질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이 21위, 일본이 22위를 차지했다. 두 나라의 20세기 역사를 돌아보면 지난 80년의 현대사는 진정 드라마틱하다.
1945년 광복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자 국민국가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정신은 ‘새로운 나라 만들기’였다. 그것은 빈곤과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산업화’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려는 ‘민주화’로 구체화됐다. 세계 시간에 뒤처졌던 만큼 그 과정은 ‘추격 산업화’와 ‘추격 민주화’로 진행됐다.
지난 80년은 ‘추격과 추월’의 시간
이젠 새로운 시대정신 추구할 때
AI·바이오 등 신성장 전략 세우고
민주주의 제도의 재설계 나서야
추격 산업화는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전략으로 나타났다. ‘선성장 후분배’가 그 요체였다. 경제성장은 빠르게 이뤄졌고, 물질적 삶은 가파르게 향상됐다. 이 추격 산업화 안에서 추격 민주화가 배태됐다. 물질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자유와 인권을 위한 민주화의 열망이 높아졌다. 그 결과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전개됐고, 그 기반 위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됐다.
추격 산업화와 추격 민주화의 성취는 한 집단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시민과 노동자, 기업가와 관료, 박정희와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정치가의 역할이 컸다. 엘리트사관과 민중사관 모두 역사에 대한 일면적 해석이다. 엘리트와 민중 모두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민’으로 호명돼 왔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이 생산적으로 결합해 ‘추격하기와 뛰어넘기’를 시도해온 것이 광복 80년의 우리 역사였다.
문제는 2025년 현재 우리나라가 서 있는 자리다. 국면사의 시간에서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사건사의 시간에서는 ‘피크 코리아’라는 경제적 두려움, ‘늙어가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적 불안, ‘시대역행적 계엄’이라는 정치적 위기 앞에 위태롭게 서 있다.
광복 80년을 맞이해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정신은 둘이다. 첫째, 새로운 산업화 전략으로서의 ‘경제성장2.0’.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사회에서는 ‘녹색성장’ ‘창조경제’ ‘소득주도성장’ 등이 추진됐다. ‘혁신성장’ ‘동반성장’ ‘포용성장’ 등 이름이 훌륭한 전략 또한 제안됐다. 내 생각은 간단하다. 무엇이라 명명하더라도 성장의 일차적 주체가 기업이라면 분배의 일차적 주체는 정부다.
경제성장2.0의 프로그램은 분명하다. 시장과 국가 관계의 가치중립적 재정립, 이에 기반한 인공지능(AI)·바이오·에너지·문화산업 등에서의 신성장전략의 추진, 미·중 패권 전쟁에 대응해 아시아 시장으로 향하는 신통상전략의 모색, 그리고 디지털 대전환에 조응하는 자본과 노동 간 사회협약의 체결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장과 분배, 효율성과 형평성, 기술 경쟁력 강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서로 다른 목표들을 가능한 함께 추구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민주화 기획으로서의 ‘민주주의2.0’. 나는 2022년 스탠퍼드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에서 신기욱 소장과 함께 내놓은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에필로그’에서 2022년 대통령선거를 포퓰리즘·탈진실·문화전쟁 시대에 치러지는 대선이라 명명하고 분석했다. 포퓰리즘이 상대 세력의 혐오와 악마화를 부추긴다면, 탈진실은 정치적 부족주의와 극단주의를 성행시키고, 문화전쟁은 사회를 심리적 내전 상태로 몰아넣는다.
민주주의란 생각의 차이가 발생했을 때 폭력의 가능성을 줄이는 제도이자 문화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익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령이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까닭은 무엇보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선동하고 가스라이팅하는 21세기 포퓰리즘에 있다. 민주주의는 유튜브 이상의 것이다. 초연결 및 초개인화 시대에 권력을 분산하는 제도의 재설계와 타자를 인정하는 문화의 성숙은 더없이 중요한 우리 민주주의의 이중 과제다.
광복 80년을 맞이해 떠오르는 말이 둘이 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1947년 김구 선생이 발표한 ‘나의 소원’에 나오는 언명이다. “우리 인생은 길어 / 미로 속에선 날 믿어 / 겨울이 지나면 / 다시 봄은 오는 거야.” 2018년 BTS가 부른 ‘Answer: Love Myself’에 나오는 구절이다.
BTS는 2019년 한 인터뷰에서 김구 선생의 ‘문화의 힘’을 언급한 바 있다. 5175만의 대한민국은 지구적으로 어엿한 중견 국가다. 광복 80년을 맞이해 BTS 노래를 이렇게 고쳐 쓰고 싶다. 역사는 길다. 지금 미로 속에 있다면, 다양한 개인들이 어우러진 ‘우리’는 스스로를 믿자. 이 겨울이 지나면 새로운 봄이 온다는 것을, 어엿한 대한민국의 힘을 믿자.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