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레터. 남자는 100m 출발선에 선 것처럼 초조했다. 올해 고교 졸업 후 미국 유학에 나선 박모(20)씨. “지난 2월 광화문 미대사관에서 비자 발급 인터뷰를 봤는데, 너무 긴장해서 영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10분 뒤 영사가 노란색 종이를 주더라.” 노란색 종이는 ‘옐로 레터’로 미국 비자 발급 거절을 뜻한다.
그린 레터. 미 명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계획이었던 김모(30)씨. “미대사관에서 10분 만에 녹색 종이를 건넸다. 지난해 촛불집회 참석을 문제 삼은 게 아닌가 싶었다.” 녹색 종이는 그린 레터다. 비자 발급 보류를 의미한다. 박씨와 김씨는 ‘다행히’ 비자 인터뷰 ‘재수’ 끝에 학기 시작 전인 지난 8월 미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비자 발급이 곧바로 안 되자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말했다.
미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체포·구금됐다. 비자 조건 위반이 이유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1월 취임하자마자 내건 ‘미국 우선주의 정책 과제’ 중 첫 번째가 이민 통제 및 국경 보안 강화였다. 트럼프 2기. 미국은 비자를 외교전의 최전방에 배치했다. 관세 전쟁 와중의 비자 전쟁이자 관세 전쟁을 겸한 비자 전쟁이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5월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공격적인 비자 취소” 방침을 내세웠다. 그런데 중국과 관세 전쟁 휴전에 돌입한 지난 8월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유학생을 60만 명까지 허용한다”며 180도 돌아섰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이 관세 전쟁과 비자 전쟁을 연계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루비오 장관의 발언 즈음 주한 미대사관도 유학생 비자 발급을 전면 중단했다. 그러다 “SNS 계정을 전면 공개하라”며 발급을 재개했다. 정치 성향과 반미 활동을 본다는 것. 앞서 김씨가 “촛불집회 때문 아니냐”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한국인의 미국 비이민 비자 3대 축인 B-1/B-2(상용관광)·F-1(학생)·J-1(교환방문)의 발급 건수가 급감했다. 지난 3~5월 792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만1059건의 72% 수준이다. J-1 비자를 받은 남편을 따라 J-2(배우자) 비자로 미국에 간 허모(35)씨는 “비자 인터뷰 전 단계인 DS-2019(입학허가서)부터 7개월이나 걸렸다”며 “올 들어 그린 레터가 쏟아지면서 미 대학들도 눈치를 보는 것 같더라”고 전했다.
특히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 체류 기간의 두 배인 6개월을 머물 수 있는 B-1/B-2는 37%나 빠졌다. B-1/B-2 비자는 ESTA와 함께 조지아에서 체포된 한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소지하고 있었다. 국내의 한 비자 전문가는 “미국의 B-1/B-2 발급이 한국인 근로자 체포 전부터 현저히 줄어든 건 일종의 전조 현상으로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며 “현장과 비자 목적이 일치하지 않은 관행을 눈여겨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E-2(투자)와 H-1B(전문직)가 적합한 비자라는 의견이다. B-1 비자에 대한 해석이 모호해서다. 지난 1일 외교부가 B-1 비자와 ESTA로 대미 투자와 관련한 동일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미국 측과 확인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런데 미국은 H-1B 연간 발급을 8만5000건으로 고정해 놨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싱가포르(연 5400명)와 칠레(연 1400명)는 H-1B 별도 쿼터를 확보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미국과 FTA를 체결했지만 쿼터는 없다. 재발급을 포함해 지난해 H-1B를 발급받은 전 세계 39만9395명 중 한국인은 1%인 3983명에 불과하다. 올 1~5월 발급은 지난해 대비 17.5% 줄었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비자 승인 비율도 뚝 떨어졌다. 미 연방이민국(USCIS)에 따르면 지난 1~3월 비자 발급 신청은 총 388만 건. 이 중 239만 건(61.6%)이 승인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83.9%(347만 건 중 291만 건 승인)보다 22.3%포인트나 줄었다. 그런데 거절 비율은 9.4%에서 6.3%로 더 떨어졌다. 보류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미 비자 전문가인 김철기 법무법인 한미 대표변호사는 “승인율 감소, 보류 비율 증가는 인터뷰의 세분화와 장기화, SNS 등 사생활 영역 검증 강화 등으로 행정 절차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며 “코로나 이후 비자 수요 증가, 공무원 감축 정책에 따른 행정 공백도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인의 미국 입국 문턱은 앞으로도 계속 높아질까. 김 변호사는 “트럼프는 관세와 투자·반이민 정책의 혼란 속 여론의 지지 등 얻고 싶은 걸 얻어 나갈 것”이라며 “H-1B 비자의 경우 문턱을 오히려 높여 최상위 인재 유치에 집중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장 연구위원은 “트럼프도 외국 인력 없이는 미국 내 산업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외국인 대신 내국인으로 채울 수 있다고 보고 지금의 비자 정책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