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김동식·서수진·예소연·윤치규·이은규·조승리·황모과·황시운 지음
문학동네 | 256쪽 | 1만6800원

“주문처럼 내뱉었다. 최대한 적게 일하고 싶다. 최선을 다해 살고 싶지 않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인 ‘나’는 백화점 지하 3층에서 안마사로 일한다. 직원 복지를 위해 고용된 헬스 키퍼라 고객은 백화점 직원들이다. 진상 손님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직원들은 안마실에서 푼다. 마사지하는 중에 말을 걸지 말라거나, 어차피 안 보이는 불을 끄라는 식의 갑질이다.
‘월급사실주의’ 세번째 앤솔러지
조승리·예소연·김동식 등 참여
평범한 사람들의 노동과 삶을
판타지 아닌 사실 기반해 다뤄
진심을 다해 일해봤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안마를 받던 한 직원은 말한다. “샘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 전에 계셨던 분도 얼마나 열심히 마사지해주셨는지 몰라요. 직원들도 만족도 조사하면 매번 최고라고 추켜세웠는데 결국 재계약은 안 됐어요.” 나는 깨닫는다. “이곳에서의 현명한 근로 방식은 적게 일하고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만 힘을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글 속에서 ‘나’가 일하는 백화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피라미드다. 손님으로 표현되는 최상위 계급은 돈을 무기로 직원에게 갑질을 하고, 백화점의 정규직 직원들은 비정규직인 안마사를 하대하며 “나 여기 명품관에 있어요”라고 외친다. 약자라고 해서 다를 바도 없다. 피라미드의 규칙을 익힌 화자는 “백화점 복지는 협력업체 직원들에게까지 돌아가지 않는다”는 원칙 위에서 협력업체 직원들을 무시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한국소설이 드물다는 문제의식으로 결성된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내놓은 앤솔러지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의 표제작에 담긴 얘기다. 실제 시각장애인으로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을 쓴 조승리 작가가 썼다.
월급사실주의는 소설가 장강명 주도로 만들어졌다. 작가들은 노동 이야기를 판타지가 아닌 사실에 기반해 쓴다는 규칙 위에서 글을 써야 한다. 2023년부터 작가들을 모아 앤솔러지를 내고 있는데 이번이 세번째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인 소설가 예소연도 ‘아무 사이’로 이번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시니어시터로 일하는 ‘희지’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근성이랄 것이 없는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삶을 살던 희지는 시터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다. 돌보는 할머니의 집을 방문한 날, 집주인의 갑작스러운 퇴거 통보로 잠시 한눈판 사이 휴대폰만 덜렁 두고 할머니가 사라져 버린다. 퇴근 전까지 단 두 시간 사이에 희지는 보호자 몰래 할머니를 찾기 위해 온 동네를 휘젓는다.
“이대로 할머니가 영영 사라져버린다면… 내 삶은 송두리째 망가지고 말겠지.” 희지는 할머니를 찾지 못하면 베스트 시터로서 자신의 일도, 자신의 삶도 모두 망가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노동의 가치가 무력해진 사회라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취미라거나 심심해서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고 있다. 그렇기에 노동이란 누군가에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일 수도 있다.
앤솔러지의 장점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다양한 작가의 시각을 볼 수 있는 데 있다. 앤솔러지에는 조승리, 예소연을 비롯해 김동식, 서수진, 예소연, 윤치규, 이능규, 황모과, 황시운 등 8명이 참여했다.

앤솔러지의 문을 여는 김동식 작가의 글은 게임 아이템을 파는 일로 먹고사는 이의 이야기를 다룬 ‘쌀먹: 키보드 사냥꾼’이다. “덜 벌더라도 고통받지 않는 하찮은 일”을 하고 싶었던 주인공은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기 위해 번듯한 직장인이 되고 싶지만 실패한다. 양극화된 노동시장에서 질 좋은 일자리를 찾고 싶지만 무력해진 청년의 이야기는 사회의 그림자를 그대로 옮겨낸 듯하다.
앤솔러지의 문은 황시운 작가의 ‘일일업무 보고서’가 닫는다. 장애인고용의무할당제를 따르기 위해 채용된 업체에서 무의미한 기사 스크랩 업무를 하는 중증장애인의 얘기다. 세진은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무가치한 일로 번 밥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나면 살 것 같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디에라도 쓸모가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한국 사회의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과 삶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