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밤 수놓은 유상철 댄스…스포츠와 예술은 통한다

2025-08-01

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기적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 손과 접시, 테이블과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듯한 선명한 붉은빛이었다.”(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저곳은 산타페다. 미국 중부 뉴멕시코 주의 주도(州都). 인구 8만5000명 남짓한 작은 도시다. 그곳에 아메리카 선주민의 문화가 살아 숨 쉰다. 도심에 문을 연 갤러리만 250개에 이르는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해발고도 2134m. 건조한 사막기후가 만든 산타페의 빛은 도시의 영혼과 같다. 그 빛이 나그네의 호흡기를 물들인다. 하루키가 인생의 석양을 보았음직하다.

윔블던 남녀 우승자 ‘만찬 춤’은 전통

‘독자께서는 어디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보았습니까?’ 이 질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답을 돌려받을 것이다. 필자는 가장 먼저 인천 을왕리의 해넘이를 떠올린다. 연안부두에서 통통배를 타고 가서 본 그날의 태양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그 다음은 로마다. 2015년 9월 10일, 이탈리아 여행 중에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도착하던 날의 일몰.

하지만 오늘은 남국(南國)의 석양을 말하려 한다. 1990년 11월, 아직 젊은 기자일 때다. 필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었다.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가 그곳에서 열렸다. 독자가 알 만한 우리 선수는 강철·이임생·윤정환·조진호 등이다. 2018년 봄에 세상을 떠난 남대식 선생이 감독을 맡았다. 한국은 15일 열린 결승에서 북한을 제압했다.

한국은 1981년 이후 9년 만에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 대회가 각별한 이유는 이듬해 6월 세계청소년대회(포르투갈)에 남북한 단일팀이 출전했다는 데 있다. 단일팀은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 선전한 끝에 8강까지 올랐다. 같은 해 5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이 여자단체 우승을 차지한 데 이은 쾌거였다.

1990년 11월 16일 저녁,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에서 송별회를 열었다. 선수단 숙소인 카르티카 플라자 호텔의 대연회장에서 호화스러운 만찬과 화려한 공연을 준비했다.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선수들이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추는 순서가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이런 자리에 잘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용감하게 달려 나간 선수가 있었다. 유상철이다.

밴드가 비틀즈의 ‘I saw her standing there’를 연주했다. 유상철은 아주 멋진 춤 솜씨를 보여 줬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시원시원한 춤. 단연 돋보였다. 이날 유상철은 동료들로부터 ‘유제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춤과 제비를 직결시킨 이유를 알기 어렵다. 이 별명이 언제 ‘유비’로 바뀌었는지도. 그는 훗날 월드컵 영웅이자 ‘슛돌이’ 이강인의 스승이 됐다.

필자는 이날 귀국준비를 하려 자카르타 시내에 나갔다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유상철을 마주쳤다. 그는 붙임성이 좋았고, 늘 웃고 있었다. 행사 시간에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했기에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길 저편으로부터 우리의 정수리 너머까지 선홍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에 흠뻑 젖고 말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유상철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자카르타 도심의 붉은 하늘을, 카르티카 플라자의 그랜드볼룸을 떠올린다. 그리고 넥타이를 푼 흰 셔츠 차림으로 무대를 누비던 그의 춤을 생각한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날 의외로 카타르, 시리아, 바레인 등 서아시아 선수들이 플로어를 지배했다. 엄숙한 이슬람교의 이미지에 익숙했기에 뜻밖이라고 느꼈다.

스포츠 기자로 일하면서, 스타 선수들이 운동 외에 다양한 재능을 겸비했음을 알게 되었다. 대체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다. 춤도 그 일부다. 성공한 선수들 중에 ‘몸치’는 없다. 좋은 경기를 하려면 리듬을 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스포츠 스타가 연예스타, 특히 가수나 배우와 짝을 이루는 경우가 잦다. 두 사람의 리듬이 일치했을 것이다.

윔블던 테니스 대회의 남녀 우승자는 챔피언 만찬(Champions’ Dinner)에서 춤을 함께 춘다. 윔블던만의 전통이다. 올해는 여자 우승자 이가 시비옹테크와 남자 우승자 야닉 시너가 무대를 장식했다. 두 사람 모두 2001년생. 청춘 남녀의 춤사위는 얼마나 싱그러운가. 더구나 윔블던의 경기장은 그랜드슬램 대회 중 유일하게 잔디코트다. 푸르다.

베이비붐 세대의 영웅 이소룡은 배우이기 전에 스포츠맨이었다. 엽문의 제자로서 절권도와 영춘권의 대가였다. 눈이 나빠 근접전에 능한 무술을 익혔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영화를 통해 강한 동양인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훗날 성룡이나 이연걸이 이룩한 업적은 이소룡의 유산에 기초했다.

이소룡에게는 숨겨진,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재주가 있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브루스 리(Bruce Lee)와 차차차(Cha-cha-cha)를 입력하면 이소룡이 여성 파트너들과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도 여럿 있다. 이소룡의 차차차는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마리아 엘레나’에 맞춰 춘 맘보 못잖다.

스포츠에는 음악이 깃들인다. 기운생동(氣韻生動). 이탈리아 축구를 즐겨 본다는 소프라노 조수미는 “축구와 음악은 모두 흐름을 타는 운동”이라고 했다. 교향곡의 4개 악장이 속도와 흐름을 달리 하듯 축구 경기에서도 비슷한 템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축구와 음악 모두 사람의 감정을 타오르게 한다고도 했다.(전광열, 『축구·음악의 공통점』)

스포츠와 예술의 거리는 멀지 않다. 조지 거슈인의 협주곡 선율을 타고 미끄러지는 김연아의 스케이팅은 예술인가 스포츠인가. 미국프로농구(NBA) 선수로 활약한 샤킬 오닐은 가수이기도 하다. 그는 1993년 음반사와 계약하고 데뷔 앨범인 ‘샤크 디젤’을 발매했다. 디스코그라피는 스튜디오 앨범 5개, 컴필레이션 앨범 2개, 사운드 트랙 2개, 싱글 19개에 이른다.

엘리트주의 문턱 낮아지는 문화예술

예술가들도 스포츠를 사랑하고 재능을 뽐낸다. 특히 음악가들.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모터스포츠에 미친 사람이었다. 토스카니니의 연주회를 보려고 오토바이로 300㎞ 넘는 길을 달린 적도 있다. 60세 생일 선물로 배기량 250㏄짜리 모터바이크를 받고 가장 기뻐했다고 한다.(김호정, 『무대 밖에선 스포츠광이었던 세계적 음악가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는 탁구광이다. 200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동대문 시장에 가서 탁구 라켓을 구입했다.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도 탁구라면 만사 제치고 테이블 앞에 나선다. 한국 클래식의 자랑인 정경화·명훈 남매도 탁구를 사랑했다. 남매가 함께 탁구를 치는 사진이 월간 『객석』에 남아 있다.

축구팬이 가장 많다.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는 영국 울버햄튼의 광팬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인 지휘자 다니엘 하딩은 오페라보다 축구경기가 우선이라는 사나이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응원한다.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도 축구팬이다.

2002년에 별세한 지휘자 임원식 선생은 병석에서도 월드컵 중계를 시청했다. 농구를 특히 사랑해서, 경기인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1948년 런던올림픽 대표를 지낸 김정신 선생과는 막역했다. 김정신 선생의 아들로 농구대표팀 선수와 감독을 거쳐 태릉선수촌장을 역임한 김인건을 피아니스트 아내와 맺어준 사람도 임 선생이다.

스포츠와 예술의 근친성을 뒷받침하는 사례는 많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속에서 둘 사이는 멀다. 스포츠를 둘러싼 문화논쟁도 근원은 다르지 않다. 학자들은 스포츠가 문화인가 아닌가를 다퉜다. 소스타인 베블런,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스포츠는 문화일 수 없다고 했다. 칼 딤은 스포츠와 문화의 연관성을 여러 사례를 통해 제시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스포츠를 창조적 행위의 근원이라고 규정했다.

스포츠가 문화냐 아니냐는 논쟁은, 문화란 매우 고상하고 고차원적인 그 무엇이라는 규범적 이해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쟁점은 스포츠가 그와 같은 조건을 충족시키는지 못하는지에 있다. 오늘날 문화는 엘리트적 편견을 떨쳐내고 있다. 현대인에게 스포츠는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에서 여름 저녁 프로야구와 ‘치맥’을 빼놓고 도시인의 삶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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