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쇄 탄핵을 둘러싼 정치 진영의 극한 갈등과 혼란 와중에 해외에서 들려온 소식들이 씁쓸하고 착잡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5개 영역 평가)에서 한국은 167개 국가 중 32위(10점 만점에 7.75점)로 지난해보다 10단계나 하락했다. 2020년부터 4년 연속 포함됐던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이번엔 미국(7.85점, 28위)과 같은 수준인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떨어졌다. EIU는 윤석열 대통령의 12·3 계엄을 언급하며 “한국 정치의 특징인 양극화가 정치적 폭력과 사회 불안을 증폭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민주주의 다양성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179개국 중 41위를 기록해 지난해보다 1단계 하락(총 4단계)했다. 1년 전엔 가장 높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됐던 한국이 이번엔 '선거 민주주의 국가'로 1단계 하락했다. 지난해에 이어 ‘독재화가 진행 중인 국가’로 분류됐다. 대통령이 자유를 유달리 역설했는데 이런 평가가 나왔으니 나라 망신이 아닐 수 없다.
헌재는 탄핵 국면서 신뢰도 저하
선관위는 '부패한 가족회사' 오명
개헌 때 이런 헌법기관도 수술을
유엔이 정한 '세계 행복의 날'(3월 20일)에 맞춰 발표된 '세계 행복 보고서(WHR)’도 우울한 소식이다. 147개국을 대상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 사회적 지원, 건강한 기대수명, 선택의 자유, 관대함, 부패 인식 등 여섯 가지 기준으로 삶의 질을 평가해 순위를 산정했다. 한국은 5단계나 떨어져 58위(일본 55위, 중국 68위)를 기록했다. 정치 혼란이 주는 고통 때문에라도 국민이 행복할 수 있겠나 싶다.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권 모두가 부끄럽게 여기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조사 결과들이다. 그런데도 원인 진단을 놓고 정치 진영에 따라 입맛대로 해석한다. 가장 큰 책임은 정치에 있다고 본다. 국정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이 누구보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동시에 정치의 한 축인 국회, 거대 의석을 무기로 국정을 사실상 마비시킨 야당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대통령은 탄핵소추 대상이라도 되지만, 30번째 탄핵을 발의한 야당의 일방통행은 브레이크조차 없다.

동시에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두 헌법기관의 무거운 책임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물론 1987년 민주화의 결실로 태어난 헌재는 그동안 적잖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헌재 자체가 갈등과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174일이나 끌었던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 사건에 이어 윤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도 100일을 넘겨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는 심리 기간이 역대 최장이다. 법과 양심에 따라 결론을 내면 될 텐데 이 눈치 저 눈치를 보기 때문이 아닌가. 오죽하면 헌재와 출범 연도가 같은 진보 성향의 민변이 1988년 이후 처음 변호사대회를 열어 "헌재의 선고 지연은 그 자체로 부정의"라고 직격탄을 날렸겠나.
선관위의 행태는 '선거 민주주의 국가'라는 스웨덴 기관의 평가를 무색하게 한다. 부실한 선거 관리가 선거 부정 논란을 촉발해서다. 게다가 헌법기관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채용 특혜를 남발하다 선관위는 '부패한 가족회사'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헌재와 선관위의 공통점은 견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란 점이다. 선관위는 독립성을 이유로 감사원의 직무감찰조차 받지 않는다. 헌재는 상급심이 없는 단심제(審單制)라 방망이를 두드리면 이의제기가 불가능하다. 모두가 수긍할 공정한 결정을 헌재가 내놓을지 의문도 적지 않다. 문형배 체제의 헌재가 불신을 자초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나.
헌재와 선관위가 앞으로도 막대한 예산을 지출하며 권력기관으로 존재할 이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분출한다. 정치 혼란 수습을 위해 개헌을 추진할 경우 헌재는 대법원에 통폐합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선관위는 상설 기관으로 두지 말고 조직을 축소해 정부 부처에 이관하자는 견해도 있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역사적 소명을 다 하면 물러가는 것이 순리 아니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