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과 미몽

2025-03-25

2024년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령으로 시작된 정치적 혼란을 우선 매듭지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 일정이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탄핵 기각 소식은 불길한 예감까지 더하고 있다. 그러나 유별나게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간다는 소식은 들린다. 물론 봄의 화신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도 올 수 있지만 솟아오르는 봄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동안 많은 시민이 한국 사회의 근간인 헌법의 정신과 이에 따른 법 해석에 관한 많은 정보와 지식도 습득할 수 있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헌재의 선고일과 결정을 둘러싼 온갖 예측만이 난무하게 만든 헌재를 향한 짜증과 비판의 소리도 점점 커진다고 한다.

1987년 체제의 산물인 한국의 헌재는 1951년에 설립된 독일의 연방 헌재를 모델로 해서 1988년에 설립되었다. 나치 독재와 군사독재를 각각 경험한 두 나라 사이에 생긴, 괴테가 묘사했던 일종의 ‘선택적 친화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5월10일,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치가 민주주의 위기로 제 기능을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을 ‘반지성주의’를 꼽으면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러한 거창한 철학적 언술에도 대화와 협치는 없었고 합리성을 뒷받침하는 과학이나 지성과는 거리가 먼, 그와 그의 처를 둘러싼 ‘천공’이니 ‘건진 법사’가 주관하는 주술세계와 연관된 물의는 끊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2년 반이 지난, 작년 12월3일 밤에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비상계엄령을 윤석열은 선포했다.

국회가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반국가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기 위해서 비상계엄령이라는 불가피한 조처를 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 친위쿠데타 시도는 국회의원과 시민의 결연한 저항으로 결국 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고 그는 탄핵과 내란죄로 헌재와 형사법정에 서게 되었다.

계몽될 대상은 윤과 하수인들

지난 2월26일 탄핵심판 최후 진술에서 그는 “12·3 비상계엄은 과거의 계엄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계엄이 아니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는 이 나라가 지금 망국적 위기 상황에 부닥쳐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고, 주권자인 시민이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함께 나서달라는 절박한 호소”라고 주장했다.

계엄령이 대국민 호소라는 이런 주장에 맞추어 계엄령은 ‘계몽령(啓蒙令)’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반지성주의에 이어 계몽이라는 철학적인 언술 체계를 빌려 계엄령을 변호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17세기 말에 들어서서 인간 이성을 통해 정치적 개혁, 교육과 학문의 고양과 경제와 사회개혁의 길을 열었던 계몽의 시대에 대해 배웠다.

이와 함께 계몽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많은 사상가의 설명이 있었지만 이의 고전적인 정의는 칸트에게서 발견된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미성년 상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 원인이 지성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지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 있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계몽의 표어다.”

한자 문화권에서도 계몽이나 훈몽(訓蒙)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글자 그대로 ‘어리석음을 일깨운다’나 ‘가르치고 깨운다’는 뜻으로, 주로 스승이 제자에게 도덕이나 예절을 가르치는 것처럼 수직적이고 타율적인 의미를 띠었다. 그러나 칸트가 정의했던 계몽의 의미로 이해되고 사용된 시기는 동아시아가 서구 문물과 접촉하면서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갈등을 빚기 시작한 19세기 중엽부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계몽령은 단어 그대로 계몽을 명령하는 법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지도 이미 오랜 사회에서, 그것도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모범이라는 한국에서 흡사 계몽군주가 몽매한 백성을 가르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막 내리길

그러나 무장한 군인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장면부터 헌재의 심판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스스로 이번 계엄 사태가 안고 있는 본질을 적확하게 꿰뚫어보는 깨어난 시민을 가르치려 든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계몽되어야 할 대상은 오히려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과 그의 하수인들 아닌가.

또 극우 보수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일부 개신교도들은 연일 탄핵 반대를 외치는 집회에 참가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부정선거에 대한 확신과 성소수자나 중국에 대한 혐오성 발언에 ‘할렐루야’나 ‘아멘’으로 답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뉴스를 보니 문뜩 공화주의자 상징이자 동시에 이의 파괴자였던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온 복고와 반동의 시대에 그의 중심에 선 프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망명한 혁명 시인 하이네의 풍자적인 운문시집 <독일, 겨울동화>가 떠오른다.

중세 암흑시대에 건조하기 시작한, 라인강변에 있는 쾰른 대성당은 신성 로마제국(962~1806)의 정치적 상징물의 하나였고 1871년에 성립된 독일제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1856년 하이네가 파리에서 사망한 후인 1880년에야 완성된 쾰른 대성당에 대한 그의 시는 당시 보수적 가톨릭 교회와 정치의 결탁을 비판하면서 이 대성당이 오히려 미완성 상태로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보아라/ 달빛을 받으며 저기 우뚝 솟은 녀석을/ 시커멓게 솟아있는 저것이 쾰른 대성당이다/ 그건 정신의 바스티유감옥이어야만 했다/ 간교한 교황 숭배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거대한 감옥 안에서 독일의 이성이 사그라질 거라고/ 그때 루터가 나타나 큰소리로 ‘멈추라’고 외쳤다/ 그때로부터 대성당 건축은 중단된 채로 있었다/ 대성당이 완성되지 않은 건 잘된 일이다/ 바로 미완성된 사실이 대성당을 독일의 힘과 신교적 사명의 기념비로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하이네가 살아있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보이는 극우 보수 개신교의 행태를 보고 어떤 시를 남겼을까. 이들이 세운 교회라는 거대한 미몽의 감옥 속에 갇혀 이성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그는 특유의 풍자를 담아 묘사했을 것 같다.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겁박하는 한 목사는 “앞으로 우리 광화문 세력이 윤석열 대통령 남은 2년 임기 안에 적극 협조하여 국회도 해산시켜버리고. 이건 헌법 위의 권위인 국민저항권만이 할 수 있는 거야”라고 공언한다. 또 다른 목사는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고 설교하면서 “대한민국 파이팅”을 외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예언자의 외침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설교를 빙자한 정치적 선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의 가톨릭 교회를 향해 큰소리로 멈추라고 외친 그러한 루터를 지금의 한국 교회는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느낀다.

하이네는 겨울동화의 마지막 장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미래로 향한 메시지를 남겼다: “위선의 늙은이는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들은 점차 무덤에 들어갈 거다. 이들은 거짓말 병으로 죽어간다. 새로운 인간은 자라고 있다. 가식과 죄라곤 없는, 자유로운 생각과 얽매이지 않는 즐거움, 이들에게 나는 모든 것을 건다.”

만약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다면 이미 시작된 정신적인 내전은 한국 사회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하다. 따라서 막강한 헌재가 지닌 시대적 사명은 그만큼 무겁다. 어둡고 추운 한국의 2024~2025년의 겨울동화가 하루빨리 안정과 평화로 끝나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막을 내리기를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에서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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