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2025-03-05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2월 14일 중국 여순의 일본 관동군 관할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감방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재판은 생각했던 대로 결말이 났지만, 동양의 대세를 설득해서 동양평화정책을 주장하려고 했는데,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통탄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일본의 4천 만인(당시)이 안중근이란 이름을 크게 부르는 날이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다. 이 같은 백년의 풍운은 언제나 그칠 것인가?"

안중근을 우리 역사에 크게 부각시킨 분은 역사학자로 알려진 박은식 씨다. 안중근과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일찍이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도 교류했던 박은식 씨는 역사학과 함께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상해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을 지낸 분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한국통사》는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정리한 명저로 유명한데 거기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에 근거하여 안중근을 평가할 때 대한 사람은 몸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라 하였고 또는 한국을 위해 복수한 열렬한 협객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런 찬사에 그친다면 미진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적 안광을 가지고 평화의 대표를 자임한 사람이다." ​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고 한 말과 상통하는 평가다.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대표하는 영웅 안중근,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각국과 세계에 한국인의 기개를 알린 안중근 의사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도 있었고 그의 힘찬 필치의 글씨도 많이 알려졌다. 그런데 그의 삶과 글씨를 한자리에 모아서 보는 기회는 많지 않다. 지금 광화문 한복판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안중근 書(서)>라는 전시회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안중근의 마음과 인품과 포부와 큰 뜻을 안 의사가 남긴 글씨를 통해서 보도록 하는 자리다.

지난 1997년 안 의사 순국 87주년을 맞아 서울을 찾은 나카노 야스오(中野泰雄) 일본 아세아대학 교수는 언론인이었고 정치가였던 자신의 아버지 나카노 세이고(中野正剛)가 일본의 전시(戰時) 수상인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를 비판하다가 1943년 일본군 당국에 의해 강요당한 자결로 세상을 떴지만, 자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일본이 행한 전쟁이 부득이한 방위전쟁이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러다가 아버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를 접하게 되고 비로소 안 의사의 큰 뜻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안 의사는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에 의해 가혹한 고난에서 신음하는 한국민의 고뇌뿐만 아니라 대일본제국의 소행에 의해 무익한 희생을 강요당하는 일본 국민에 대해서도 형제로서의 깊은 인애심(仁愛心)울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부당한 제국주의 정책에 입각한 허위 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으면서도 장차 정의의 회복에 의해서 한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승천(昇天했습니다."

태어날 때 가슴에 북두칠성과 같은 모양이 있어 조부가 이름을 응칠(應七)이라고 했다는 사실. 역사에 능통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해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렸다는 일화, 20살부터 그는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무기를 자비로 사서 군사 훈련을 하였으며, 1906년에는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시작했고, 1907년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러시아의 연해주로 가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총독으로 추대한 이병윤의 인솔 아래 참모중장이 되어 1908년 6월에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한 사실. 1909년 3월 2일에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손가락 하나씩을 맹세의 표시로 자른 일,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시찰 명목으로 하얼빈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0월 26일 아침 9시 반경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사실 등은 박은식 선생이 기록으로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한 안중근 의사의 삶을 지켜온 생각과 결심들이 그가 남긴 60여 점의 확인된 유묵 가운데서 고름 30여 점 글씨 속에서 찬연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독립된 조국에 자신의 유해를 묻어달라던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말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유해를 찾아 봉환하겠다고 중국 여순(旅順) 일대를 여섯 일곱 번이나 찾아 땅을 파보았던 삼중 스님도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에 대한 염원은 어찌 되었을까?

서울에 와서 강연한 나카노 야스오 교수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아시아의 병란(兵亂)은 35년 뒤에 끝났지만 '백 년의 풍운'은 아직도 바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의 인구는 (처형 당시) 4천만의 3배로 불어났습니다. 여전히 이또오 히로부미의 허상을 믿고 거짓된 역사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올해로 의거 116돌, 한일수교 60돌을 맞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에 처형됐다. 20여 일 뒤면 순국 115돌이 된다. 전시회는 3월 말까지 이어진다. 안중근 의사를 제대로 다시 보고 이를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말해주려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이 기간에 가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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