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면리장침(綿裏藏針)과 조맹부(趙孟頫)

2025-03-05

'솜처럼 부드럽다'라는 표현이 있다. 순백의 목화(木化)를 수확한 후, 속에 든 씨앗을 제거하면 바로 솜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면리장침(綿裏藏針. 솜 면, 속 리, 감출 장, 바늘 침)이다. 첫 두 글자 '면리'는 '솜의 속'이다. '장침'은 '바늘을 감추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솜 속에 쇠붙이나 바늘을 감추어 꽂는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면리장침'은 맥락에 따라 2가지 상반된 뉘앙스를 가진다. 첫째, 겉이 부드러우나 속엔 강인함을 가진 경우다. 애초 문인화가 겸 서예가 조맹부(趙孟頫. 1254~1322)가 '부드러운 획 안에도 강한 기운이 꼭 포함돼야 한다'는 의미로 썼다. 둘째, 온화한 표정으로 마음 속 흉악한 의도를 감춘 경우, 즉 부정적 뉘앙스다. 소리장도(笑裏藏刀), '포장화심(包藏禍心)' 등이 유의어다.

조맹부는 송(宋)을 건국한 조광윤의 11대 손이다. 항저우(杭州)가 수도였던 남송(南宋. 1127~1279)이 몽고 군대와 서로 대치하던 시기, 지금의 저장(浙江)성에서 태어났다. 남송의 고위 관료였던 부친을 11세에 여의었다.

25세에 남송이 멸망하자 그는 의기소침한 상태로 바깥 출입을 삼가며 지냈다. 모친이 하루는 눈물을 내비치며 신신당부한다. "너는 서자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사별했고 최근엔 왕조까지 바뀌었다. 집안의 경제적 형편도 궁핍해졌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원(元. 1271~1368)나라도 결국 한족 인재를 등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문을 익히며 때를 기다리면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취지였다.

모친의 눈물에 자극을 받은 조맹부는 심기일전했다. 저명한 유학자에게서 고급 학문을 익히고, 화가 전선(錢選)에게서 그림을 배우며 약 10년을 보냈다. 차츰 그의 이름이 원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져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이 우선적으로 초빙하길 원하는 인물에 포함됐다. 그의 기량이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평가될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조맹부는 30대 중반에 지금의 베이징(北京)에 도착해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중앙 정부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세조가 고령이 되자 조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한족이고 송나라 종실 출신인 조맹부는 요동치는 정국에서 희생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휩싸인다.

이런저런 노력 끝에, 길게만 느껴지던 중앙 정부에서의 6년 생활을 마감하고 산둥(山東) 지역 지방 관료로 부임했다. 그가 임기를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제2대 성종(成宗)이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40대 초반에 고향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에 힘썼다.

제4대 인종(仁宗)이 그를 다시 초빙해 조정으로 복귀시켰다. 지위가 종1품에 이르렀고 늘 황제 주변에 머물며 매우 분주했지만 오히려 그는 송 황실의 후예이기에 장식 꽃병처럼 쓰이는 그런 신세라고 부끄러워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시도 남겼다. "머리 벗겨지고 이가 빠지는 63세에 이르니, 지난 일들이 수치스럽게만 느껴지네. 그래도 나름 필묵에 힘을 썼으니 후세 사람들이 이에 대해 담론하게 되리라."

배우자이자 좋은 벗이던 문인화가 관도승(管道昇)의 장례를 핑계로, 66세에 궁궐을 떠나 귀향했다. 거듭된 조정의 복귀 명령에도 나이를 핑계로 거절하고 계속 고향에 머물렀다. 향년 68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이로써 동유럽 일부와 러시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등 여러 문명을 아우르던 글로벌 용광로 대몽골국도 문화 분야에서 튼실한 버팀목 하나를 잃었다.

‘면리장침’, 이 네 글자는 조맹부 송설체(松雪體)의 별칭이기도 하다. 특히 서성(書聖) 왕희지 서체를 골간으로 한 그의 해서(楷書)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회화 분야에선 말(馬) 그림에 능했다. 욕마도(浴馬圖), 인기도(人騎圖), 추교음마도(秋郊飮馬圖) 등이 있다.

고려 말 재상을 지낸 이제현(李齊賢. 1288~1367)이 상왕 충선왕(忠宣王)을 수행하며 원의 수도에 머물던 젊은 시절, 그와 자주 왕래했다. 이 인연으로 '면리장침' 송설체가 조선 초기 크게 유행했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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