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1392년 조선이 한양에 개국하고 3년후 경복궁을 건립하면서 정문을 세웠다. 세종 때 정문을 광화문으로 명명하여 오늘에 까지 이어진다. 광화문 앞 거리는 육조(六曹)거리 라고 불리우고 양 옆으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였다.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국정이 논의되고 시장이 열렸다. 지금은 육조거리가 세종로거리로 지명이 바뀌어 정치의 광장이 되고 있다.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곳에서 탄핵의 찬⦁반을 둘러싸고 함성소리가 장안을 가른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지만 주장하는 목소리는 상반된다. 이제 우리는 가뿐 숨을 멈추고 광화문으로부터 들려오는 역사의 소리를 들어보자. 광화문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허물어지고 1865년 대원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복원된 광화문이 다시 허물어지질 위기를 맞은 것은 일제시기였다. 일제는 경복궁 경내에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철거하려고 하였다.
이때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 네가 이 세상에 있다는 기억이 냉랭한 망각 가운데 장사(葬事) 되어 버리려 한다” 이것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목소리였다. 1922년 그는 광화문이 철거되는 것을 통분히 여겨 일본잡지 <개조>에 글을 올린다. “사라져 가려고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 라는 제목의 그의 글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총독부는 광화문 철거를 포기하고 동편으로 이전하였다. 그로 인해 2010년 광화문을 온전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 노력한 일본인의 목소리가 광화문을 지켜 준 것이다. 1984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세종로 사거리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듣는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노라. 내가 이를 위해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것이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것은 1446년 10월 9일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 서문이다. 당시 공용문자인 한자를 사용하지 못하는 백성이 90% 이상이었다. 한자를 익혀 사용하기 까지에는 6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한글을 익히는 것은 한 두 주일이면 된다.
대신들은 사대부가 조선의 뿌리라고 생각하고 한글 창제가 성리학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백성이 이치를 깨닫고 정치로 향하게 되면 그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도 세종은 백성을 신뢰하며 문자를 창제하였다. 창제자가 누구인지 밝혀진 문자 중에서 한글의 창제는 선구적이다. 당시 세계는 르네상스(문예부흥) 아래에서 학문과 문화, 과학기술의 발전이 풍미하던 시기였다. 세계사적 흐름속에서 내·외의 반대속에서도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은 자주성의 표본이다.
광화문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광화문에 나서는 사람들은 광화문에서 들려오는 역사의 생생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번에 우리는 내 나라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외세에 의탁하지 않고 주권자인 국민의 손으로 민주공화국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