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잘 지내기 위한

2024-11-05

밤 열 시, 지나간 하루를 복기하고 내일 일과를 꼼꼼하게 준비하기 좋은 시간이다. 습관처럼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치열했던 지난여름의 흔적을 지우려는지 살갗으로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선선해진 밤공기와 제법 조화롭다. 앉아있던 책상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책 한 권 들어갈 정도의 틈이었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더욱 커진 풀벌레 소리와 함께 달빛까지 밤공기를 타고 방안으로 흘러든다. 손톱만한 초승달이 오늘따라 또렷하게 보이는 게 이번 달도 꽤나 바쁠 모양이다.

수행자에 필요한 고독의 시간

쓸쓸함·외로움과는 다른 의미

“말라붙은 마음 소생시킬 장소”

책상 위에 걸린 달력에서 큰 숫자 아래에 매달린 작은 숫자를 확인해 보았다. 어느덧 음력 시월이다. 세월 참 빠르다. 한해를 갈무리할 시간이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삭발 날짜가 보인다. 잠시 움찔했다. 출가자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자신의 출생일은 잊더라도 출가한 날은 잊지 못한다는 점이다. 긴 머리카락을 떨구던 그날의 생생한 느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머릿밑 속살에 닿는 삭도기의 날카로움이라던가, 고개 숙인 채 칼날을 기다리던 그 떨림 같은 것 말이다.

출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된다 해도, 출가는 오롯이 자신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머리 깎은 날도 잊어버리고 넘어갈 뻔했네.’ 그렇다. 법회, 차담, 강의, 원고, 방송 등 쉴 틈 없이 하루하루를 헤쳐나가야 하는 보편적이지 않은 출가자의 일상을 이유로 정작 나 자신에게 남겨주어야 할 시간을 챙기지 못했다. 정작 내게 필요한 고독의 시간을.

“벽을 향해 앉아서 장삼 자락 여미니/왼갖 근심 걱정 노여움도 멀어지고/어리석은 욕심도 아득히 멀어지고...” 문득 일찍 떠난 범능 스님의 노래 ‘삼경에 피는 꽃’이 떠오른다. 고독 아래로 외로움이 찾아드는 시간인가 보다.

흔히, ‘고독’이란 단어를 쓸쓸함과 외로움이란 단어와 비슷한 뜻으로 사용할 때가 많다. 나아가 고도의 산업화가 초래한 현대병이나 인간관계 결함으로 인해 각자 처한 환경에서 기인한 결과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나라고 별수 없다. 어감부터가 왠지 고립된 느낌을 주어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독은 외로움에 뿌리를 둔 동질의 의미는 아니다. 그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내면과 만나는 혼자의 시간이 ‘고독’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자의식이 강한 독립적 존재였다. 사회적 동물로 진화된 것은 다만 집단의 결속력이 곧 생존의 유리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무리에서 이탈하거나 제외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다. 그런 심리적 요인이 ‘혼자 있음’을 의미하는 고독을 외로움과 쓸쓸함의 동질 개념으로 한정 짓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은 적이 있다. 고독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그 소설이 떠올라 다시 꺼내보았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첫 문장이 이렇게 강렬할 뿐만 아니라, 절밥 먹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나 또한 묘한 동질감에 손을 떼지 못하고 다시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말한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다시 읽다가 이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지. 나도 그래.’ 아니, 누구나 그럴 것이다. 특히 외길 인생을 걷게 되면, 고독에 직면할 시간이 더 많다. 부처님의 6년 고행이나 달마대사의 9년 면벽, 성철 스님의 장좌불와(長座不臥)도 결국엔 자신과 만나는 길고 긴 고독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자신과의 치열한 만남이야말로 자신은 물론 모두의 삶까지도 변화시킬 힘이 되지 않을까?

『대지』의 작가 펄 벅은 고독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곳은 말라붙은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이다.”

우리는 소통을 강요받는 네트워크 세상에서 산다. 나조차도 그것이 자비행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비행의 사회적 의무와는 별개로 고독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 스스로와 온전하게 마주할 용기. 타인과의 소통만이 아닌 자신과의 소통의 시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삶이 더 원만해진다. 그 시간은 바로 깊은 내면으로 숨어버린 자아를 건져낼 것이며, 오만과 독선을 깨뜨려줄 것이요, 따스한 성찰로 귀결될 테니까.

꽃이 지고 마른 잎 서걱거리는 계절에 ‘고독은 외로운 게 아니야’라고 말하려니,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낡은 관념은 버리고 새로운 해석과 인식의 전환이 있으면 더 나은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다. 부디 이 아름다운 계절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보기를!

원영 스님·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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