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장류학자가 쓴 신간 '아버지의 시간'
요즘 아빠들은 아이 돌보는 데 적극적이다.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을 만드는 것은 물론 아이를 안고 재우기도 한다. 맞벌이가 많아지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아빠가 육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지원 속에 육아 휴직도 비교적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한다. 정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률을 2022년 6.8%에서 2027년 50%, 2030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비단 아이가 어렸을 때만 육아에 참여하는 건 아니다. 학교나 학원 상담 때도 아빠들이 엄마 대신 가기도 한다. 예전에 '마마걸'이 대세였다면 요즘엔 '파파걸'도 많아졌다. 이런 변화는 베이비부머 세대(1946∼1964년생) 때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빠는 '바깥일', 아내는 '집안일'이 거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만 그랬던 건 아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영장류 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캠퍼스 교수는 거의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남편도 가정일을 간혹 돌봤지만, 애를 보살피진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었다. 보수적인 미국 남부지방에서 큰 허디 교수는 자라면서 "나는 남자가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신간 '아버지의 시간'(에이도스)에서 회고했다.
남자가 아이를 돌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세기까지만 해도 남성들은 육아에 동참하길 꺼렸다. 남성은 나가서 일하고, 전쟁하는 '호전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과학적으로도 수컷이 육아에 참여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전 세계 5천400종의 포유류 가운데 수컷이 새끼를 돌보는 건 5%에 불과하다.
여러 실험을 통해서도 여성이 육아에 유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암컷은 새끼가 태어나기 전부터 호르몬 변화가 일어난다. 출산 후 어미 쥐의 혈액에는 여성호르몬 에스트로젠뿐 아니라 보호와 양육을 촉진하는 옥시토신, 수유를 촉진하는 프로락틴이 방출된다. 특히 옥시토신은 출산 후 아이를 곁에 두도록 해 아이와 '애착 관계'를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수컷들이 새끼를 돌보는 경우도 있으나 어류, 양서류 등 일부에 국한됐다. 특히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흡사한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대형유인원들은 수컷이 새끼를 돌보지 않는다. 대형유인원 중에 인간만 남성이 아이를 돌볼 줄 알았다.
다윈주의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암컷이 자식을 양육하는 동안 수컷은 지위와 짝을 얻기 위해 때로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방식으로 서로 경쟁하면서 자식을 기르는 일과는 다른 활동에 몰두한다. 수컷의 관심사는 더 많은 자식을 낳는 데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영아 살해'에 나서기도 했다. 침팬지나 원숭이 사회에서 영아살해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그러나 1982년 깜짝 놀랄만한 연구가 나왔다. 영국 동물학자들은 마모셋 '수컷'이 새끼를 데리고 다니고 돌보는 동안 프로락틴 수치가 5배 증가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마모셋뿐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인간 남성도 아이를 돌보면 호르몬에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여러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책에 소개된 여러 연구를 보면 아이를 키우는 남성의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은 줄어든다. 일부 연구에서는 테스토스테론을 주로 형성하는 고환의 크기가 아기를 돌보는 기간 작아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에 반해 옥시토신은 크게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스라엘 과학자 루스 팰드먼이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기 출생 6개월 내 평균 옥시토신 수치는 엄마와 아빠가 비슷했다. 남성이 임신과 진통 수축 또는 모유 분비 반응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에 비춰 놀라운 일이었다. 다만 엄마는 아기 얼굴을 보거나 아기를 안을 때 옥시토신 수치가 올라간 반면, 아빠는 아이와 상호작용하며 자극적인 놀이를 할 때 수치가 높아졌다. 놀이 시간 동안 아기의 옥시토신 수치도 덩달아 올라갔다. 또한 양육하는 남성의 뇌에서는 계획 능력과 의사 결정에 관여하는 영역인 전두엽 피질에 집중된 뇌 네트워크가 활성화했다.
저자는 내분비적인 연구 결과뿐 아니라 다양한 인류학적 증거를 열거하며 남성의 몸과 마음 안에는 이미 양육본능이 내재해 있다고 말한다. 이어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협력 양육은 필수적이었고, 수컷의 돌봄과 양육은 문화적 차원을 넘어서 신경학적·내분비학적으로도 아주 오래전에 진화한 '본성'이라고 강조한다.
"돌봄 반응이 어머니만의 전유물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이제 내려놓아야 할 때다. 모든 남성 안에는 오래전 수컷들에게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남성들은 생계를 책임지거나 가부장이 되기 이전에 돌보는 사람이었고, 돌보는 사람이 되기 이전에 보호하는 존재였다. 남성들은 아기들이 발산하는 변화의 힘에 반응할 수 있는 몸과 뇌를 가지고 있었다."
김민욱 옮김. 542쪽.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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