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명의

2025-04-23

얼이 깃드는 굴이라는 얼굴은 정신의 형태이자 됨됨이다. 관상(觀相)은 그 사람의 드러남이다. 설명할 수 없는 직감, 그것은 빅데이터 기반의 안면 인식이다. 첫눈에 반함과 이유 없는 싫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결정론자는 아니지만, 얼굴에 시간이 새겨진다는 말엔 공감한다. 인간관계는 생각보다 오픈 테스트일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부터 잘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더 단단해진다.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뜻하는 명의. 처음 환자와 대면하는 순간 적어도 난 그에게 명의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것도 명의일까? 오진을 할 수도 있다. 굳어진 얼굴은 치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연 없는 얼굴 없다.

환자도 의사의 관상을 본다. 명의 말고 ‘명환’들은 보자마자 안다. 특히 원장님이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들까지…심지어 어제 술을 마셨는지도 안다. 나는 훌륭하지 않은데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왔을 때의 간극. 나의 최선과 환자의 기대치, 서로 패를 펼쳐야 승패가 갈린다.

다행히 내 거짓말은 잘 먹히지 않는다. 불편하지만 편하다. 내 진심이 잘 전달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최선을 다해도 환자는 간신히 만족할까 말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느 날 오묘한 관상의 환자가 왔다. 얼마 전 어디서 임플란트를 심었는데 그때부터 머리와 턱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얼굴도 모르는 치과의사의 변호인으로 선임되는 순간이었다. 설명을 할수록, 그 치과의사라면 내 편을 들지 않았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보는 눈도 있으니 적당히 잘 보내면 다시는 안 온다.

환자들은 다 안다. 내가 집중하고 있는지, 귀찮아 대충 하고 있는지, 회피하려는 건지, 실력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그냥 사람 자체가 별로인지….

환자는 치과의사를 적극적으로 고른다. 나를 보자마자 만족할 수도 설명 듣고 실망할 수도 있다. 치과의사는 환자를 소극적으로 거른다. 환자가 떠나면 당장 별일은 없겠지만 언젠가 그 무심함의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치과의사 윤리선언문 중,

‘우리는 항상 영리적 동기보다 환자의 복리를 먼저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헌법 제1조 제1항처럼 보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요새 유행어가 있다.

‘관상은 과학이다.’

관상은 과학이 맞다. 하지만 모호한 느낌과 애매한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치과의사로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잘 안 맞는데 억지로 붙잡을 필요는 없다. 나보다 더 잘 맞는 원장님이 있을 것이다. 환자를 위하는 길은, 때로는 정중히 관계를 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슬쩍 피한 똑똑한 환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내 관상을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환자가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정확히 알고 한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진심이라도 실력을 넘는 시도는 환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의사도 관상이 있다.

환자는 의사를 고른다.

‘그러니, 환자도 관상을 본다.’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며, 거울을 보자. 이제는 이유를 밖에서 찾지 말자. 관상은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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