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은 사회의 자원 배분에 관한 큰 틀의 의사결정인 만큼 기술적 조합보다는 가치와 정치의 문제이다. 지금 국회 연금개혁 논의는 이런 관점에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국회에서 다루던 연금개혁 의제는 보험료율과 연금급여 수준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금개혁 논의에 국민연금 자동삭감장치라는 이슈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공식 용어는 자동삭감장치가 아니라 자동조정장치이지만, 결국 인구 고령화에 맞춰 모든 국민연금을 자동으로 깎는 것이므로 자동삭감장치로 불러도 맞을 것 같다.
시작은 지난해 가을 윤석열 정부가 뒤늦게 연금개혁안을 내놓으며 자동삭감장치를 집어넣은 것이었다. 이전 정부위원회나 국회 연금개혁특위, 무엇보다 시민 공론화에서도 연금 자동삭감장치는 의제가 되지 못했다. 노인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인 40%에 달하는 데에다 국민연금이 평균 약 65만원에 불과한 한국에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가 자동삭감장치를 제안한 것은 놀랍기까지 했다.
계엄을 하겠다는 대통령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보건복지부 장관이 2월 국회에 와서는 ‘국민연금 국고투입은 부적절하고 자동삭감장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는 걸 전해 듣고 진지한 협의 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자동삭감장치 도입은 국민연금 급여 수준을 가랑비에 옷 젖게 하듯이 떨어뜨릴 수 있다. 계산에 따라 다르지만 생애 총 연금액이 15~20% 줄어들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소득대체율을 올려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국회 논의에서 자동삭감장치 도입안이 갑자기 부상하였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 자체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윤석열 정부 연금개혁안은 살아남아 잘하면 오래도록 국민연금이 ‘자동으로’ 축소를 거듭하도록 활용될 수도 있겠다.
누군가 은근슬쩍 집어넣은, 사소한 줄 알았던 조치가 제도의 방향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고령화 국면에서 국민연금이 제대로 노후보장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보험료 인상과 국고 투입을 비롯한 여러 재정확충 수단을 제때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자동삭감장치를 지금 넣는 것은 미래 사회보장제도의 역할을 지키기보다는 줄이는 쉬운 선택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약간의 복잡함과 불확정성 덕분에 자동삭감장치는 정치적 쟁점에서 비켜나기 쉽다. ‘자동’이므로 연금급여를 깎을 때에도 법 개정을 위한 국민 의견수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유연함과 연금개혁의 탈정치화를 장점으로 내세운다. 달리 보면 이는 노후 불안정성 확대이자 민주주의의 회피이다. 국회가 승인해야 자동삭감장치가 발동하도록 조건을 달면 괜찮다는 주장도 하지만, 자동삭감장치의 취지상 이런 부차적 조건쯤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자동삭감장치는 작아 보이지만 연금삭감 효과는 크고, 노후보장의 패러다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를 통해 연금 삭감이 일상화되면 국민연금의 역할은 줄어들고 노후 불안정과 불평등은 더욱 커질 것이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의 자동삭감장치는 저연금자와 나이 든 노인에게 더 가혹하다. 물론 청년 세대도 영향을 피해갈 수 없다.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이 이런 노후보장 공백을 메울 수도 없다. 일하는 시기에도 불안정하고, 노후소득인 국민연금 또한 가치를 유지할 수 없다면, 남는 것은 자기 보호와 탐욕의 철학뿐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번거로운 이에게 자동조정장치는 꽤 유혹적인 선택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를 귀찮아 한 대통령의 자기파괴적 행위를 지켜본 바 있다. 국회 연금개혁 논의가 시민의 삶과 공동체의 노후보장에 대한 철학 위에서 이루어진다면 논의 테두리를 정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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