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대선주자 탐구
전쟁의 상흔이 조금씩 아물어가던 1960년대 초의 한 연말. 시골 마을 주막집 봉놋방에 여섯 명이 누워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른 두 명과 자녀 네 명으로 구성된 그 집단은 아픈 발과 추운 몸, 주린 배를 부여잡으면서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온종일 걸어서 그곳에 이른 길이었다. 주막 마당에는 그중 가장 큰 어른, 아버지가 끌고 온 리어카가 있었고 그 속엔 보잘것없는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이삿짐이었다. 지금 같으면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넉넉하게 갔을 그 이삿길을 그들은 리어카를 끌면서 허위허위 걸어갔다. 너무도 가난했던 그들에게는 차를 빌릴 만한 돈이 없었다.

이삿길의 절반 지점, 위천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에 그 주막이 있었다. 입성도 시원치 않았던 그들은 추위에 온몸으로 대적하느라 꽁꽁 얼어 있었고, 변변치 않은 신을 거리에 담긴 조그만 발에는 물집이 잡혀 있었다.
그들은 배가 고팠다. 그러나 아버지의 여윳돈은 충분치 못했다. 그들 여섯 명은 2인분을 주문해 허기만 달랬다. 그 보잘것없는 양은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새로운 허기를 불렀다. 아이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봉놋방 벽에 붙어 있던 메주를 몰래 떼어다가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자는 둥 마는 둥 했던 그들은 날이 새자 다시 다시 추운 길바닥에 나아가 리어카를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그 길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아이 중 한 명이 훗날 술회한 당시의 느낌이다.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그 가족 중에 훗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이가 나온다고 한다면 몇 명이나 믿었을까.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1950~60년대생 중 많은 이가 그랬겠지만 그중에서도 그들의 빈곤은 차원이 달랐다. 그 한 명의 공부를 위해 온 가족이 희생해야 했던, 어린 가장이 되는 바람에 돈을 버느라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아예 학교 문턱은 구경조차 못 하고 고사리손으로 뼈 빠지게 노동해야 했던 그들은 이를 악물고 노력해 입지전의 표본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를 맡겠다”고 국민 앞에 나섰다. 서두의 그 후보를 필두로 너무나도 가난했던 네 명의 대선 주자 이야기, 그 서막을 열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