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에서 광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양옆으로 펼쳐진 단풍에 눈길을 뺏겼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속도를 늦췄다. 2차로로 천천히 주행하며 음악을 틀었다. 빨강, 주황, 갈색, 노랑, 연노랑의 색 잔치에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여름의 산은 온통 초록의 동색으로 나뭇잎들이 햇빛에 조금이라도 더 닿기 위해 치열히 경주하더니 지금은 각자의 색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낮고 높은 능선의 변화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수종의 단풍들이 고속도로 양편에서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다.
단풍을 보며 우리 인생을 생각해 본다. 젊은 여름은 누구나 치열하게 살다가도 인생의 가을이 되면 각자 나름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구별되는 색깔을 그토록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각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사람, 그런 화가가 있다. 번듯한 집안의 자녀였다면, 권번 출신, 또는 요릿집 여주인이 아니거나 그저 단순히 남성이었다면 그 이름을 더 화려하게 드러냈을 여성 화가가 전주에 있었다.
이 여성 화가의 이름은 허산옥(1924~1993)이다. 그 이름이 귀한 까닭은 전북 미술사에서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여성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북의 여성 화가로는 박래현(1920~1976)이 있으며, 서예까지 범위를 넓혀도 김진민(1911~1991) 정도이다. 그러니 허산옥이라는 이름은 더 귀한 것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 이름을 점점 더 잊어간다. 그 이름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김제 출신이었던 허산옥은 16세에 남원 권번(여성에게 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곳)에 입적했다. 이후 전주 풍남문 근처에 행원(杏園)이라는 큰 요릿집을 열어 번듯한 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녀는 행원 운영으로 큰돈을 벌기도 했지만 생계가 어려운 이웃이나 공부할 돈이 없는 고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독지가이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예술인들을 보듬어 준 곳도 행원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허산옥이란 이름을 알린 건 그림과 글씨였다.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인 강암 송성용, 화가인 의재 허백련을 사사하였고, 연묵회와 연진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행원 운영의 고단함 속에서도 예술의 길을 정진해 나갔다. 꾸준히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16번을 입선하고, 현대미술초대전 초대작가로 선정될 만큼 실력도 인정받았다.
전주에서 내로라하는 요릿집을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전주, 광주의 선생님들을 찾아 그림과 글씨를 배웠고 새벽 두세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붓을 들었다. “사위가 고요한 새벽에 하얀 화선지를 대하고 있으면 머리가 깨끗해져요”라고 말하며 바위에 쉼 없이 떨어져 구멍을 만들어낸 물방울처럼 고된 예술의 경지를 조금씩 넓혀간 허산옥. 그래서 그녀의 국화 그림은 새벽 기운에 더 닿아 있고, 장미 그림은 더 진한 내음을 풍기고 있나 보다.
이 늦가을에 행원을 찾았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정원에 꽃은 지고 연못에 빨간 금붕어 몇 마리만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밝은 피아노 연주가 오히려 행원의 적막감을 더 돋우었다. 반질반질 윤택이 도는 마루와 문지방을 보면서 그 당시 손님과 직원들이 분주히 오고 가며 떠들던 시절을 상상해 봤지만, 그 여주인은 이제 여기에 없다.
여성 화가들이 겪은 불평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도 뿌리 깊다. 남성 중심의 시선으로 바라본 미술사에서 여성 화가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전시 기회나 평가에 있어서 차별을 받아왔다. 그런 시절에 권번 출신이자 요릿집을 운영하던 허산옥은 여성 화가로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삶을 꿈꿨던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술관에서 찾아보길 권한다. 전북도립미술관 1~4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전북미술사연구시리즈 전시 “허산옥, 남쪽 창 아래서”에서 우리가 그녀의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아보자.
전북도민일보 창간 37주년을 마음 담아 축하합니다.
유치석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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