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동력이자 서민 연료…'석탄 혁명' 불씨 꺼진다 [센서스 100년]

2025-10-15

“무연탄이 들어가는 33개 주요 도시는 장작 반입을 엄금한다.”

1961년 겨울을 앞두고 정부가 내놓은 긴급 연료 수급대책의 내용 일부다. 당시 정부는 월동용 임산연료의 물량을 제한하고, 무연탄이 들어가는 33개 주요 도시에 장작 반입을 금지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은 물론이고 도시에서조차 장작이나 솔잎을 연료로 쓰는 집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남산에서 땔감을 구해다 밥을 짓거나 난방을 해결한 서민이 많았다. 전쟁으로 황폐한 산에 그나마 남은 잡목마저 겨우내 땔감으로 잘라냈으니 숲이 온전할 리 없었다.

산림이 황폐해 장작이 귀해지자, 정부는 연탄 보급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했다. 1960~70년대 ‘아궁이 혁명’이라 불릴 만큼, 석탄은 한국 근대화의 에너지 기반이 됐다. 1970년 통계청(현 국가데이터처)의 주택총조사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취사용 연료로 연탄을 쓰는 가구가 52.1%로 가장 많았는데 나무도 47%나 됐다. 석유나 가스는 1%에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읍·면으로 내려가면 나무를 쓰는 가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면 단위 농촌에선 나무를 연료로 쓰는 가구가 85.6%에 달했다. 1960년대는 전체 에너지 소비에서도 장작이나 솔잎과 같은 자연 연료 비중이 높았다. 1968년 1차 에너지 소비내용을 보면 자연 연료 비중이 29.5%, 무연탄(연탄)이 33.7%로 엇비슷했다. 에너지용 석유는 32.2%였다.

장작 사용은 기대만큼 크게 줄지 않았다. 정부는 1973년 강력한 치산녹화 계획을 들고 나왔다. 그해 2월 산림청을 내무부로 옮기고, 치산톡화 10년 계획에 따라 산림법을 뜯어고쳤다. 강력한 입산통제와 연료 채취지역 및 시기·방법 규제가 도입됐다. 대신 농어촌에 연탄아궁이를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하지만 현실을 무시한 규제는 큰 혼란을 불렀다. 땔감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연탄값이 폭등했다. 반면 쇠죽을 끓일 땔감이 없어 소를 내다 판 농민이 급증하는 바람에 소값은 폭락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정부의 치산녹화 계획이 성과를 낸다. 1차 에너지 소비 중 자연 연료 비중이 1977년 한 자릿수로 떨어지고 에너지용 석유 비중은 55.2%, 무연탄은 24.1%가 됐다.

1970년대 아궁이는 대부분 연탄아궁이로 대체됐다. 이른바 ‘아궁이 혁명’이다. ‘연탄 한장의 온정’이라는 표어 아래 전국 가구 80% 이상이 석탄을 주요 난방원으로 사용했다. 산업화 초기 중화학공업과 제철소, 발전소까지 석탄이 국가 산업의 핵심 연료로 쓰였다.

아궁이 혁명은 산을 풍성하게 만들었지만, 달갑잖은 부작용도 동반했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대표적이다. 1973년 서울대 의대 윤덕노 교수팀의 조사에 따르면 1959~1968년 법정 전염환자는 33만8025명이 발생해 9344명이 사망했는데, 연탄가스 중독환자는 54만3270명이 발생해 13만2282명이 목숨을 잃었다.

1980년대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에너지정책에 구조적 변화를 꾀했다. 연탄 대신 석유와 가스를 주된 에너지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1980년 기름보일러의 국산화 성공은 연탄보일러를 빠르게 밀어냈다. 1차 에너지 소비에서 무연탄 비중은 1991년 7.9%로 떨어졌고, 1990년대 후반에 이르자 도시에서 연탄재가 자취를 감춘다.

발전에서도 석탄의 비중은 점차 축소되는 중이다. 지난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재생에너지 중심 에너지 대전환’을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세부 과제 중 하나로 ‘2040년 석탄 발전 폐지’를 제시했다. 정부는 2038년까지 석탄 발전소 40기를 폐쇄하고, 2040년 이후 나머지 21기도 단계적 폐지하겠다는 계획이다. ‘아궁이 혁명’이 국민 생활 속으로 석탄을 끌어들였다면, 지금은 ‘탈(脫)아궁이 혁명’이 그 불씨를 서서히 꺼뜨리고 있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2023년 기준 1차 에너지 공급에서 석탄 비중은 24.8%다. 발전 부문에서도 석탄 화력 비중은 37.9%로 감소세가 지속하고 있다. 한때 전국 300곳 넘던 석탄 탄광은 지금 한 곳만 남았다.

지난 6월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가 폐광지원 대상 광산으로 선정되면서 문을 닫게 됐다. 1936년 문을 연 도계광업소는 2023년 화순광업소, 2024년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은 이후 명맥을 유지한 대한석탄공사 산하의 유일한 탄광이었다. 마지막 국·공영 탄광인 도계광업소가 폐광함에 따라 국내에는 도계읍에 있는 민영 탄광인 경동상덕광업소 단 한 곳만 남게 된다.

폐광 지역은 인구 유출과 고용 공백을 겪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석탄 화력 28기 폐쇄 시 1만6000명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고용 전환 등을 고려한 ‘정의로운 전환’이 탈석탄의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광복 80년 센서스 100년 “숫자는 기억한다”

한국에서 통계 조사를 시작한 건 1925년 인구총조사(센서스)부터다. 한국의 센서스에는 100년의 역사가 담겼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총조사는 1949년에 실시했다. 한국통계진흥원이 지난 2008년 발간한 책 『대한민국을 즐겨라-통계로 본 한국 60년』과 국가데이터처 통계 등을 통해 광복 이후 80년간 한국의 발전사를 조명해본다.

〈목차〉

① GDP는 5.3만배 껑충, 문맹률은 78%→0%…광복 이후 대한민국

② "불임시술하면 승진" "셋째 휴직 불가"…'저출생 부메랑' 된 장면

③1951년 한해 390% 오른 '살인물가'...1982년 이후 두 자릿수 상승률 사라졌다

④"겁난다" 살벌한 외식물가…반세기 '엥겔법칙' 깨진 까닭

⑤석탄 산업의 퇴장…‘아궁이 혁명’의 불씨가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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