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원 공장밥 먹는 사장님, 250억 쏟아 특목고 지었다

2024-10-10

성큼 가을이 왔지만 여전히 반소매 셔츠에 멜빵, 짙은 색 바지 차림이다. 지금은 경기도 김포시 월곶으로 이사왔지만, 서울 청계천 시절부터 30년 넘게 고수하는 트레이드 마크 복장이다. 겨울엔 여기에 잠바(점퍼)를 걸쳐 입는다. 아내와 함께 서울 여의도 집에서 출근하는 시간은 5시30분, 하루도 빠짐이 없다.

사무실 겸 창고 한구석에 놓인 책상은 살짝 삐거덕거린다. 모나미153 볼펜 검은색과 붉은색을 하나로 묶어서 쓴다. 나름 운치 부리려고(?) 책꽂이 한켠에 올려 둔 장식용 조화(造花)가 인상적이다. 딱 봐도 “나 구두쇠요” 소리치는 거 같다.

30년 넘게 반소매 셔츠, 멜빵 바지 차림

“멜빵을 메는 건 바지가 흘러내려서에요. 배가 나와서 기성복이 잘 맞지 않아요. 허리가 42인치거든요. 물건 들 때도 이런 복장이 가장 편해요. (볼펜은) 보험회사에서 주는 다색 볼펜도 써봤지만, 성능이 이것(모나미)만 못해요. 빨간색 쓸 일이 잦다 보니 테이프로 (검은색 볼펜과) 붙들어 맸지요. 제가 짠돌이입니다. 사실 굉장히 짜요, 허허.”

이름은 전병두(74), 건축용 공구를 생산·판매하는 록스기계 창업자다. 제품 생산부터 주문 접수, 납품을 도맡는 현역이기도 하다.

1950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서 태어났다. 당시엔 북한 땅이었다. 아버지는 서울 마포에서 쌀장사를 했는데, 6·25전쟁 때 인민군에게 총살돼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스물아홉에 혼자 된 어머니가 다섯 남매를 키웠다.

그의 말대로 “똑같이 가난하던 시절이라” 그 역시 가난했다. 경기상고에 다녔는데 1년 만에 그만둬야 했다. 형이 맹장염에 걸려 치료비가 필요했다. 급한 대로 대일철강이라는 철재 도매상에 취직했다.

이게 청계천과 인연의 시작이다. “누구나 그렇듯” 고단하게 일했고, 저녁에는 종로에 있는 학원에 다니며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옆 노점에서 100원짜리 수제비로 허기를 채웠다. 밤에는 사무실 철제 선반 위에 조그마한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전기풍로에 불이 붙어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그러다 회사가 부도 나는 바람에 행상을 시작했다. 손수레 위에 이것저것 미제 장물을 올려놓고 팔았다. 이듬해 “운이 좋게도” 경기상사라는 노점을 열 수 있었다. 이때가 1970년 7월 1일, 그의 공구 인생은 올해로 55년째다.

한때 청계천 공구상가에선 ‘전병두’ ‘록스’ ‘경기상사’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건설 설비공구를 제조·판매해 온 터줏대감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일을 배워 독립한 ‘제자 사장님’이 30여 명에 이른다. 한겨울만 빼고는 흰색 러닝셔츠와 멜빵바지를 입고 다녀서 ‘난닝구 사장님’으로 더 유명했다. 지금은 퇴색했지만, 1960~90년대 청계천 주변 수표동·입정동·산림동 일대는 소형 기계공장과 공구상가가 밀집한 ‘대한민국 공구 1번지’였다.

“처음엔 이태원이나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건설 장비·공구를 다뤘습니다. 이후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장병들한테서 물건이 들어왔고요. 그때만 해도 국산 장비나 부품은 구하기도 힘들었지만 품질도 조악했어요.”

난닝구 사장님 고백 “내가 봐도 짠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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