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증시’ 오명을 벗으려면

2025-11-05

‘미쳤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가파르게 오르던 주가가 5일 급락했다. 우상향 추세가 꺾였다고 보기에는 이르지만 정부·여당은 물론 투자 주체들이 호흡을 가다듬을 시점임은 분명해 보인다.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이 동시에 오르는 ‘에브리싱 랠리’의 일차적 요인은 넘치는 유동성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금융규제 완화, 확장적 재정으로 증시를 부양하고 있으며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에 기준금리 인하를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5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1.0%포인트 내렸다. 두번째 요인은 AI발 투자 열기다. AI와 관련 있는 빅테크 기업들의 주가는 그간 고공행진을 지속했다. 엔비디아 시가총액은 세계 경제규모 3위인 독일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을 정도로 커졌다. 국내에서도 반도체 슈퍼 사이클(장기호황국면) 기대감으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다음은 정부와 여당의 강력한 자본시장 선진화 의지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고, 소액 주주에게 유리한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두 차례에 걸친 상법 개정은 외국 투자자들 사이에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신호로 해석됐다. 앞으로도 자사주 소각 의무화,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 증시 부양을 위한 입법이 대기하고 있다.

5일 장세는 자연스러운 조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정부는 낙관론에 빠져선 안된다. “5000피는 당연히 가능하다” “코스피가 4000을 돌파했지만 여전히 저평가돼 있다” “빚투는 레버리지 투자의 일종”이라는 식의 언급이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투자자들로 하여금 머니게임에 뛰어드는 걸 부추기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나만 투자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니냐’는 투자자가 적지 않고 청년층과 50~60대의 신용거래(빚내서 투자하는 것)가 빠르게 늘고 있다. 코스피 5000은 결과로 기대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과잉 유동성에 따른 인플레이션 국면이 도래할 경우 충격은 불가피하다. 그렇잖아도 한국은 금융 불안요인이 산재해 있다. GDP의 90% 규모인 가계부채는 세계 최고 수준이며 부동산 거품은 여전하다. 제2금융권 일부의 부동산 대출 부실화 우려도 끊이지 않는다. 유동성 파티가 종언을 고할 시점에 대비하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이상하지 않다.

AI는 글로벌 경제의 성장 동력이지만, 경쟁적 과잉투자에 따른 거품론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오픈 AI의 기업가치는 5000억달러에 달하지만 2030년까지 흑자 전환이 요원하다고 한다. 향후 기술 운용을 위한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투자붐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진단도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닷컴버블에 빗대는 우려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주가는 성장과 기업 경쟁력 향상의 결과로 오르는 것이 순리에 맞다. 정부의 AI 대전환과 첨단 혁신산업 육성 전략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대기업뿐 아니라 벤처·중소기업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이 절실하다. 금융·재정정책의 혼합을 통한 수요확대는 긴급처방은 될지언정 한계가 뚜렷하다.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성장이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이고 그래야 증시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여의도에서는 지나가는 개도 10만원짜리 수표를 물고 다닌다더니만 주식이 미쳐부렀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은행원으로 나온 배우 성동일이 당시 활황이던 주식시장을 보며 던진 말이다. 코스피는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의 3저 호황과 88 서울 올림픽을 등에 업고 1989년 3월 1000고지를 뚫었다. 요즘은 지수와 체감 장세의 괴리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개미들이 많아서인지 그런 말이 별로 들리지 않는다.

증시 랠리가 과거처럼 자산가나 외국인들의 잔치에 그치지 않으려면 기업 지배구조 개선, 주주환원 강화, 불공정 거래 엄단 등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신뢰받는 자산운용처로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공적 투자경험이 누적되어야 가계자산의 부동산 비중을 줄일 수 있다. 모쪼록 정부와 여당은 ‘한국 증시와 사랑에 빠졌다간 배신당한다’는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긴 호흡의 로드맵을 세우길 바란다. 부동산시장에서의 패착을 덮으려 증시를 활용하려는 성급한 유혹에 빠져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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