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근대사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운요호 사건으로 막을 내린 이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시작으로 전기(1876~1910)와 후기(1910~1945)로 구분하는 데에 대체적으로 의견을 같이 한다.
전기에는 불평등조약 체계가 강요되었고 후기에는 식민지 시기여서 독립이 민족적 과제였다.
강화도조약체결 후 1883년 인천항이 정식 개항한 후 서울과 최단 거리에 위치한 이점으로 작은 포구에서 발전하여 한반도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오늘날 인천국제공항과 그 맥이 닿아있다.
일본인의 거주가 늘기 시작하면서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 오지(1871~1930)가 도쿄에 위치한 다카야마 치과의학원(現 동경치과대학)을 1893년에 졸업 후 7월에 인천에서 개원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진료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근대적 치과치료를 도입한 치과의사다. 물론 1885년 제중원에서 외교관이면서 의사인 알렌이 발치 및 충치치료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치료 범위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노다 오지는 이듬해인 1894년 4월에 서울 남대문으로 이전 했으니 인천 개원은 짧은 기간이어서 정확한 기록이나 유물은 없다는 전언이다. 개항장내 청일조계계단을 사이에 두고 일본인 거주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근대적 치의학 도입은 1874년 미국인 치과의사 윌리엄 클라크(W.Clark)가 서구식 치과의료를 소개했고 1879년 하야시 신사부로가 일본내에 최초로 치과의원을 개원했다.
노다 오지가 졸업한 다카야마 치과의학원은 1880년에 설립된 최초의 치과대학이다. 대략 메이지 유신(1868~1889)에 걸쳐 근대치의학이 태동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그 후의 일본 치의학이 한국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경부선 전노선이 개통되기(1905) 전 근대문물은 인천을 통해 들어 왔으나 일제 식민시기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시기에는 그 지위가 부산에 양도되었다.
2025년 3월에 인구 증가속도나 산업 생산력에서 제2의 도시로 도약하고 있는 인천에서 발전 중심에 있는 송도 국제신도시는 바이오산업, IT, 국제 비즈니스 허브로 성장하고 있다.
대한치과의사협회 창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치과의료기기 전시회가 근대의치의학의 효시가 쏘아 올려진 인천 송도에서 개최되니 의미가 새롭다.
특히 이번 기회로 미국 ADA와 KDA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할 것으로 예상되는 바 한국 근대 치과의료의 도입과 시작인 인천이 세계 최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근대화 시작점과 선도국가 미래점에 이정표를 찍는 100주년 행사가 4월 11일에서 13일 까지 열린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관문인 인천이 세계를 향한 관문이 되었듯이 치과계도 인천대회를 통해 도약하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
광명역, 남부터미널에서 치의신보TV취재팀이 실증해보니 30~4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100주년 행사는 치과의사들의 적극 참여로 새로운 100주년을 웅비하는 기념비적인 에포크가 될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