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록달록 피어난 꽃과 푸르게 자라난 잎이 세상을 물들이는 늦봄.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다면, 압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 ‘누름꽃’ ‘꽃누르미’ 등으로 불리는 압화는 흘러가는 계절을 붙잡았다가 다시 꺼내볼 수 있는, 말하자면 하나의 기록 방법이다.
“압화는 시간을 멈추는 일이에요. 가장 예쁜 순간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죠. 라벤더처럼 향기까지 오래 남는 꽃도 있어요.”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도록 압화 누름틀을 만드는 문예진 ‘오티에이치콤마’ 대표를 인왕산 자락에서 만났다. 그는 선물 받거나 꽃꽂이 수업에서 만든 꽃다발이 시드는 게 아까워 압화를 시작했다. 책 사이에 눌러둔 꽃·잎·줄기 등이 쌓여 그만의 식물도감이 됐고 전시로도 이어졌다. 그의 목재 압화 누름틀은 식품의약품안전처 국립생약자원관에 납품되기도 했다.
“압화는 필름 카메라와 닮았어요.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은 바로 볼 수 있지만 필름은 현상할 때까지 볼 수 없죠. 압화도 마찬가지예요. 기다리고 기대하는 시간이 저에겐 한숨 돌리는 쉼이 되죠.”

압화의 매력은 아름다운 계절을 실물로 간직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눌러둔 꽃 한장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봄날을 눌러 담고자 문 대표와 함께 인왕산 산길을 걸었다. 평소엔 지나치던 철쭉·민들레·큰개불알꽃 등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잎과 꽃을 골라 주우니 마치 산속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압화를 하려면 이처럼 산과 들로 나가야 하는 걸까.
“처음엔 동네를 돌아보세요. 앞만 보고 걷던 거리에서 고개를 돌리면 그동안 지나쳐온 계절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늘 걷던 길이 새롭게 떠난 여행길처럼 느껴지죠.”
압화는 주변의 꽃들부터 가볍게 살피는 것으로 시작한다. 점심은 물론 저녁 시간도 괜찮다. 꽃마다 ‘꽃시계’가 있어 피고 지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달맞이꽃처럼 저녁에 피고 아침에 지는 꽃도 있다. 채집할 땐 식물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꽃을 꺾고 잎을 따기보단 떨어진 것 위주로 주운 뒤 흙만 가볍게 털어 손질한다. 그런 다음 두꺼운 책 등으로 누른다. 나중에 꺼내보면 필름 사진의 한 장면처럼 그날의 빛과 결이 담겨 있을 것이다.

계절마다 모을 수 있는 식물도 다양하다. 너도나도 꽃을 피우는 봄엔 색이 선명한 팬지, 봄나물로 먹는 냉이, 은은한 색을 띤 살구꽃·매화꽃을 간직해보자. 흔한 들꽃인 큰개불알꽃이나 곳곳에 핀 유채꽃·무꽃도 좋다. 여름엔 초록빛 잎이 제철이다. 저마다 다른 모양과 빛깔의 잎을 눌러 모으면 나만의 여름 풍경이 완성된다. 스위트피·수국·델피니움 같은 여름 꽃도 추천할 만하다. 특히 델피니움은 색이 오래 유지돼 초보자가 도전하기에 적합하다. 수국처럼 한 꽃숭어리에 여러 개의 작은 꽃이 달리면 꽃을 하나씩 떼어 누르면 된다. 누른 꽃을 조립하면 다시 원래 모양이 된다.

가을은 ‘압화의 계절’이라 불린다. 붉은 빛으로 물든 단풍잎은 한 나무에서도 색과 무늬가 제각각이다. 은행잎·덩굴류·억새 등도 함께 모아두면 빛바랜 색감의 가을 모음집이 완성된다. 겨울에도 압화가 가능하다. 설국(雪菊)으로 불리는 백묘국처럼 하얀 털로 덮인 잎이나 마른 나뭇가지, 솔방울 등도 적절한 재료가 된다. 서랍에 담긴 겨울 풍경을 더운 여름에 꺼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꽃과 잎 등을 장소·시기별로 구분해 모아두면 나만의 기록이 돼요. 저는 여행 중에 채집한 식물로 여행기를 만들었고, 이 기록은 식물도감이 됐죠. 언제, 어디서, 어떤 꽃을 주웠는지 적어두면 그때의 감정도 되살아나요.”

완성한 압화는 상자나 얇은 봉투에 보관하면 좋다. 벌레가 생길까 걱정되면 제습제도 함께 넣는다. 일상에서 활용할 수도 있다. 코팅해 책갈피로 쓰거나 아크릴판 사이에 끼워 열쇠고리로 만들 수 있다. 편지지에 살짝 붙여 보내면 계절을 선물하는 방법이 된다. 문 대표는 일기장에 붙이는 것도 추천한다. 특히 여행일기에 붙여 놓은 압화는 식물 한장으로 기록된 사진과 같다.
“압화를 하면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됐어요. 일상이 색색으로 빛나죠. 익숙한 골목에도 많은 귀여움이 있었구나 싶고, 결과물을 기다리는 설렘도 커요. 봄바람 부는 산책길에서 작은 기쁨을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
조은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