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신비님은 깨비(관객)들을 다 보고 듣고 있어.”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의 도깨비 신비가 9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 한 극장 스크린에 나타나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클수록 에너지가 모인다”며 “아~”하고 외쳐달라는 신비의 말에, 눈치를 보던 관객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더해질수록 깨비 옆 ‘에너지 볼’이 커졌다. 이날 극장에 설치된 임시 수음 장치로 소리를 ‘들은’ 신비가 만족한 듯 말했다. “와, 잘하는데?”
이날 ‘인터랙티브 시네마 라인업 쇼케이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인터랙티브 신비아파트: 극장귀의 속삭임>의 한 장면이다. 생성형 AI(인공지능)·XR(확장현실) 콘텐츠 전문 제작사 아리아 스튜디오는 내년까지 이 작품을 포함한 3편의 ‘관객 참여형’ 영화를 선보일 예정이다. 관객의 음성·감정 반응을 유도하고, 그에 따라 극의 전개까지도 달라지는 쌍방향적 콘텐츠다.

생성형 AI 챗지피티(ChatGPT)와 음성 대화를 하듯, 스크린 속 가상 캐릭터와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 아리아 스튜디오가 지난 6월 공개한 버추얼 아이돌 ‘문보나’의 콘서트 영화 <버추얼 심포니: 더 퍼스트 노트>에서는 이러한 ‘실시간 소통’이 시도된다. 콘서트 실황을 담은 영상이 아닌, 문보나가 관객의 호응과 질문에 반응하며 실제 콘서트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 목표다.
1대1 질의응답에서 문보나는 준수한 대처력을 보였다. 이날 쇼케이스 진행을 맡은 방송인 박경림이 스크린 속 문보나에게 소감을 묻자, 문보나는 “긴장된다”며 말을 이어갔다. “노래 한 소절 불러달라”는 요청에는 노래를 불렀고, 즉석에서 손하트 등 포즈를 자연스레 취했다.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제 배우들이 참여한 <아파트: 리플리의 세계>는 관객에게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게 하고, 그중 다수의 선택에 따라 극을 전개한다. 배우 장혁과 조복래 등이 출연했다.
<아파트>는 기억 보존 시스템 ‘마인드 업로드’가 상용화된 2080년을 배경으로 한다. 관객들은 2009년 벌어진 미제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소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단서를 찾아내는 역할을 맡는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연다’, ‘열지 않는다’ 등의 선택지가 떠오르면, 원하는 선택지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더 많은 이들이 외친 방향으로 극은 전개된다.

<아파트>를 연출한 채수응 아리아 스튜디오 대표는 “다수결 알고리즘을 개발해 (선택지마다) 발화 양뿐 아니라, 어느 정도 주저해서 발화했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음성을 수집하는 수준이지만, 기술이 고도화된다면 시각적인 표정 등 반응에 따라 플롯이 바뀔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채 대표는 “(그렇게 된다면) 영화가 우릴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분기마다의 선택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넷플릭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등 인터랙티브 영화나 FMV(풀 모션 비디오) 게임의 극장판인 셈이다. 지금껏 나온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분기마다의 시나리오를 사전에 모두 설정하고, 각 상황을 모두 촬영해야 한다는 데서 제작비와 촬영 시간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채 대표는 미래에는 AI가 알아서 선택지 등 상황을 생성하도록 해, 서사가 ‘무한 갈래’로 뻗어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파트>는 그 가능성의 시험대가 될 예정이다. 채 대표는 “출연 배우의 동의를 받고 생성형 AI를 활용했다. 갈래가 (알아서) 생성되는 구간이 있다”며 “AI가 찍지 않은 구도의 컷을 생성해 보여주기도 한다”고 했다. <아파트>는 2D 영화 버전과 인터랙티브 버전이 따로 개봉될 예정이다.
다만 극장에서 선택지를 ‘외치며’ 보는 것보다 게임·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으로 혼자 여러 갈래를 탐험하는 것의 선호도가 높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온다. 채 대표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인터랙티브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이 새로운 집단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 부문에 초청돼 <아파트>가 상영됐을 당시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고도 따로 남아 ‘정당방위냐’ ‘살인이냐’ 등 윤리적 분기점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어떤 관객과 함께 봤냐에 따라 영화적 체험이 달라진다는 것은 다회차 관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극장과 관객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지려면, 수음 장치 등 제반 시설도 필요하다. 위 세 편의 기획·투자에 참여한 극장사 CJ CGV는 ‘인터랙티브 시네마 전용관’을 준비 중이다. 영화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가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