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선우후락(先憂後樂)과 범중엄(范仲淹)

2024-11-04

악양루(岳陽樓)는 중국에서 ‘강남 3대 명루(名樓)’ 가운데 하나다. 다른 2개는 황학루(黃鶴樓)와 등왕각(滕王閣)이다. 악양루는 남쪽으로 둥팅(洞庭)호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둥팅 호수는 그 면적이 제주도보다 넓다.

이번 사자성어는 선우후락(先憂後樂. 먼저 선, 근심할 우, 뒤 후, 즐길 락)이다. 앞의 두 글자 ‘선우’는 ‘먼저 근심한다’라는 뜻이다. ‘후락’은 ‘나중에 즐긴다’라는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근심은 세상 사람들보다 앞서 감당하고, 즐거움은 세상 사람들보다 뒤에 누린다’란 의미로 쓰인다.

‘선우후락’은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락이락(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이 엄숙한 문장에서 네 글자만 취해 만들어진 사자성어다. 악양루 수리를 기념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 후반부에 이 구절이 나온다.

범중엄은 2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개가한 모친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계부의 학대도 피하고,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청소년기에 사찰에 들어갔다. 26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섰다. 북송(北宋) 4대 인종(仁宗. 1010-1063) 통치기에 마침내 부재상에 올라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이 바로 경력신정(慶歷新政)이다.

비록 개혁은 채 2년도 지속되지 못했지만, 한 세대 뒤에 왕안석의 신법(新法)으로 이어진다. 범중엄은 지방 관료로 전전하다가 63세에 병사했다. 정치적 부침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시종일관 범중엄을 위해 세심하게 배려했다. 여러 신진 관료들과 후학들도 언행이 일치했던 그의 삶을 사대부의 모범으로 여기고 흠모했다.

범중엄은 고위 관료로 승진한 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주로 죽으로 식사를 했다. 집의 반찬은 소금에 절인 나물 위주였다. ‘나물을 씹으면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악보가 귀에 울린다’라는 위트 넘치는 문장을 남겼다.

범중엄이 사찰에서 학업에 정진하던 청소년기의 한 일화가 꽤 인상깊다. 당시 그는 매일 저녁 두 홉의 노란 좁쌀(粟)로 죽을 끓였다. 다음 날 굳으면 4등분하고 하루 두 끼니만 먹었다. 한 친구가 안쓰러워 그에게 돈을 건넸지만 거절했다. 그가 닭고기와 어류 소재의 요리를 보내주고 나중에 확인하니 곰팡이가 핀 상태였다. 친구가 화를 내자 범중엄은 말한다. “이 고기들을 먹으면, 다신 죽과 절인 채소를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입 안에 넣지를 못했어.”

젊은 시절 하루는, 범중엄이 한 관상가(觀相家)를 찾았다. “내가 훗날 재상이 될 수 있겠소?” 관상가가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의원은 될 수 있겠소?” 관상가가 괴이하게 여기고 반문한다. “재상이 될 수 있는가를 묻더니, 무슨 의원 타령이요?”

범중엄이 대답한다. “재상이 되고자 함은 고통에서 백성을 구하고 싶기 때문이오. 그게 어렵다니 백성을 병마에서라도 구해주고 싶소.” 관상가가 다시 예언한다. “당신은 재상의 재목이십니다!” 왜 조금 전과 평가가 다르냐고 묻자, 관상가가 대답한다. “관상의 으뜸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품은 큰 뜻은 재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범중엄이 ‘경력신정’에 이런저런 관료 제도 개혁도 포함했기에 정적이 더 많았다. ‘관직은 강등과 승진을 분명하게 한다. 과거제도를 엄격히 시행한다. 각 주의 장관을 신중히 고른다. 조정은 명령을 신중히 하달한다. 등등’, 모두 상식적인 내용들이다. 당시 사회가 개혁을 통해 일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상당히 부패한 상황이었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우후락’은 동료 관료들에게 건넨 쓴소리이자 후학들을 향한 업무 태도 가이드라인으로도 읽힌다. 의미를 따져보면, 누구라도 쉽지 않다는 그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전제하고 있어 더욱 매섭다.

무우물급(無愚勿及). 범중엄이 지인들에게 자주 건넨 조언 가운데 하나다. 공부 많이 하되, 벼슬만은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노출되는 지위까지 높아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최근 커뮤니케이션 관련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더 수월하게 식별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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