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으로 드러난 한국 봉건성

2025-02-03

작년 12월3일의 비상계엄 이후 두 달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 정황이 밝혀지면서 사태가 빠르게 수습될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단호한 처벌과 신속한 정국 안정은커녕 계엄을 지지하거나 그에 동조해 폭력을 행사하며 공포를 조장하는 무리들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귀족정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21세기에 군대와 종교가 정치 개입?

민주공화국에서 군대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문서상의 당위적 규정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군사쿠데타를 경험하며 시민사회가 피로 새긴 철칙이다.

그런데 비상계엄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군대는 마치 사조직처럼 움직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추행으로 불명예 전역된 민간인이 군조직과 모의하고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다(심지어 헌법재판소에 출석한 김용현은 노상원을 마치 현역인 듯 꼬박꼬박 장군이라고 불렀다). 군대가 공식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민간인의 지시를 따른 배경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있다. ‘계엄버거’와 같은 말로 희화화되고 있지만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물론 위·영관급 젊은 장교들이 비상계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지만 육사의 자기반성은 없었다. 오히려 김용현의 육사 동기들 다수가 계엄을 지지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고, 800여명의 예비역 장성이 속해 있다는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은 탄핵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런 군대를 두고 정치적 중립을 논할 수 있을까? 기수와 파벌에 복종하는 봉건적인 문화가 바뀌지 않는 이상 군대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만약 탄핵을 찬성하는 쪽이 서울서부지법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가담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수준을 넘어 경찰은 배후를 캔다며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을 압수수색하고 그 대표나 실무자들을 줄줄이 소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아는 그 배후에 대해 엄포만 놓고 있다. 현실권력을 등에 업은 종교 앞에서 공권력이 망설이고 있다.

한국에서 종교가 정치에 개입한 역사는 오래지만 이렇게 노골적, 폭력적으로 개입한 적은 거의 없었다. 전광훈은 일개 목사가 아니라 201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으로 당선된 사람이고 보수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문재인 정부를 공산주의로 몰아붙이며 국민의힘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2021년에는 국민혁명당을 만들어 직접 당대표를 맡았다. 그는 다른 교회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동성혼과 낙태 반대 등에서 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힘을 키워왔다. 반공주의와 혐오를 뒤섞은 기괴한 십자군이 종교재판이라도 열 듯 극성을 부리는데 공권력이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폭력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 편이 아니면 악이고 악을 제거해야 선을 실현한다는 극단적인 종교는 정치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토론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상대와의 타협 역시 어렵다.

계엄에 숨죽인 재벌들

이처럼 시끄럽게 드러나는 세력이 있는 반면 조용히 숨죽이며 드러나지 않으려는 세력도 있다. 환율이 요동치고 경기가 심하게 위축되어 박근혜 탄핵 때보다 경제 충격이 심한데도 재벌이나 한국경제인협회는 침묵하고 있다.

윤석열은 자유시장을 부르짖었지만 가는 곳마다 재벌총수들을 들러리로 세웠다. 해외나 국내를 돌아다닐 때 동행했던 재벌총수들은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판단할까? 박근혜 탄핵 때 약속했듯이 재벌들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스스로 끊었을까? 전문경영보다 권력과의 유착을 택해온 재벌가들이 조용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비리를 파헤쳐야 할 정치의 관심이 온통 조기 대선에 쏠려 있고 선거는 재벌들에게 유리한 면죄부가 되어 왔다는 점이다.

공공연하게 오너 리스크가 기업의 가장 큰 위험이라고 얘기해도 재벌의 가신체제는 변함이 없었다. 기업의 실패 책임은 오너가가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에게 전가되었고, 그것이 심각한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불만의 저수지, 공정의 검투장을 넓혀왔다. 그것이 극우의 온실로 되었으니 지금 상황에는 재벌의 책임도 크다.

고름을 짜내지 않으면 상처는 언제든 다시 곪는다. 고름을 짜낼 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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