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혁명을 얘기하려다 보면 먼저 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의 숙청과 단두대가 떠오르고 그 다음에는 로베스피에르의 뒤를 이어 당통(George J. Danton : 1789~1794)을 거론하게 된다. 당통은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샹파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중산층의 변호사로서 지식인 사회의 인물이었다. 어려서 수두를 앓아 얼굴에 흠집이 생긴 그는 평생 열등감 속에 살면서 스스로 사교계를 외면하는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 남들처럼 그도 초등학교를 마친 뒤 신학교에 진학했으나 신부의 길을 가지는 않았다. 그는 재학 시절, 학생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는 투쟁에 참여했다. 신학교를 중도에 포기한 젊은이들은 대체로 종교적 엄숙주의에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
혁명 재판서 비극적 최후 맞은 당통
한국의 현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
우리 정치는 온통 ‘반란’으로 도색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줄 알아야

당통은 일찍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특이한 목소리와 탁월한 논리로 뛰어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2차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 가담하면서부터 현실 정치에 입문했다. 그때 한 살 연상인 로베스피에르를 만난 것이 운명적이었다. 그는 법무장관을 거쳐 그 서슬 퍼런 공안위원회 의장이 되자 격랑을 피해 가기 어려웠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자코뱅당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급진적이라기보다는 다소는 느릿하고 게으른 편이었다. 그럼에도 시류는 그의 그러한 성격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와 자주 다투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 무렵에 아내 앙투아네트를 잃은 것이 그의 판단을 더욱 빗나가게 했다.
혁명의 와중에서 당통은 로베스피에르 및 마라와 함께 3두 정치를 실시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 시대의 3두 정치와 같은 역사의 위업을 남기리라는 몽환적인 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러한 꿈에 젖은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폭주한다는 사실이었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질주를 견디지 못했고,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이 자기와 같은 행보로 따라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은 끝내 충돌했는데 이럴 경우에는 지모의 싸움이 아니라 더 막 나가는 독종이 이긴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이 프랑스 동인도회사로부터 부정한 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기소했다. 그런데 그 혐의가 그다지 명증하지 않았다. 정적을 탄압하는 데에는 논리나 합리성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1793년에 체포된 그는 그리 길지 않은 재판을 거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옥중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차라리 가난한 어부로 살았더라면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탄했으나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는 단두대 앞에 서서, “나의 머리를 국민에게 보여 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아마도 그는 국민이 자기의 뜻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가 죽자 누군가 이런 묘비명을 세워 주었다. “그는 악행을 저질렀지만, 위선자는 아니었다.”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uechner : 1813~1837)는 명성에 견주어 24세에 죽은 단명한 극작가였는데, 그의 대표작이 『당통의 죽음(Dantons Tod)』이다. 이 극본은 그가 22세 때인 1835년에 지은 것으로 당통의 최후의 10일을 치밀한 심리 묘사로 엮은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체 4부작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뷔히너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의 작품에 포함된 허구인지 실화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를테면 『당통의 죽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곧 당통이 혁명에 실패하고 비극적 최후를 기다리면서 “그래, 어차피 혁명은 사투르누스(Satrunus)와 같은 것이었어”라고 되뇐다. 그런데 이 독백이 오묘하다. 사투르누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농업의 신으로서 주피터의 아버지이다. 영미권에서는 이를 새턴(Saturn)이라고 읽는데, 제일 먼저는 토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우주선을 띄울 때 발사된 로켓이 새턴이었고, 제너럴모터스 자동차회사에서 나오는 인기 품목의 중형차 상품명이 새턴이다. 로마인들은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1주일을 사투르누스의 축제로 지내는데, 그 마지막 날이 지금의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거기까지라면 아무 이상해할 것이 없다. 그런데 로마 신화에서 사투르누스의 마지막 생애를 보면,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아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니까 당통이 “혁명은 사투르누스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참뜻인즉 “혁명은 혁명가를 죽인다”라는 뜻이 된다. 그 말이 섬뜩하다. 나는 당통과 사투르누스를 쓰면서 질식할 것만 같은 이 시대 한국의 현실을 연상한다. 혁명인지 개혁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반란이라는 이름으로 도색된 한국 정치를 보면서 언어가 혹사되거나 오용되고 있고, 그 개혁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낀다. 역사의 실패한 모든 혁명가는 명분에 진 것이 아니라 속도 조절에 실패했다. 조광조(趙光祖)와 김옥균(金玉均)도 그랬다. 그러기에 이미 2600년 앞서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이 위태로움을 빗겨 가는 길”(知止不殆)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 정치가 그렇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