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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오는 지난 50년간의 중국 시를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망명 시인으로 유명한 그는 시가 난해하기로도 유명한데, 자신의 시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나는 내 시의 의미를 모른다”라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시의 의미는 시인의 의도와 같은 것이 아니며, 시인의 의식적 및 무의식적 의도를 벗어나 시와 독자 사이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김수영의 ‘풀’은 시의 의미라는 문제를 검토하는 데에 좋은 예가 되어 줍니다. 1968년 5월 29일, 시인이 귀천하기 20일 전에 쓰인 ‘풀’은 유작이어서 시인의 의도를 확인할 길이 없고, 그래서 더욱, 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다양한 의미들을 생성해 왔습니다.
김수영의 유작 ‘풀’의 의미 다양
‘저항하는 민중’ 위주 해석보다
바람과 풀 교감관계로 봐도 좋아
템포 빨라지는 ‘월광’과도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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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민중의 저항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이고, 그 풀은 바람이라는 억압에 맞서 저항하는 풀로 해석되며 저항하는 민중의 메타포가 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을 수동적 상황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이런 읽기가 성립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바람과 풀의 비유는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미 공자 말씀에서부터 등장했습니다. 『논어』에 나옵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니, 풀 위에 바람이 가면(불면) (풀은) 반드시 눕습니다.”
공자의 이 말씀은 난세의 억압적 정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소강(小康)세계(이상 사회)의 덕치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람과 풀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화해관계입니다. 풀이 바람에 눕는 자연 질서가 소강세계의 덕치에 구현되는 것입니다. 소강세계가 끝나고 난세가 시작되면 덕치는 명분일 뿐 실제로는 법치를 앞세운 억압의 통치가 행해집니다. 이때 바람과 풀의 화해 관계는 내세워지는 명분일 뿐 그 실제 내용은 억압 관계이고, 바람과 풀의 비유는 이제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립니다.
김수영 시의 바람과 풀은 대립관계일까요, 화해관계일까요? 처음에는 대립관계였다 하더라도 시의 진행과 더불어 화해관계로, 더 나아가서는 교감관계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바람은 풀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풀과 어울리기 위해서 풀이 좋아하는 비를 몰고 옵니다. 풀이 눕는 것, 우는 것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기쁨의 눈물도 있고 공명의 울음도 있지 않습니까? 눕는 것도 유희의 동작, 기쁨의 동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풀밭에 서 있는 사람이 바람 불 때의 풀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실존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나 풀과 바람의 관계를 여성과 남성의 관계의 비유로 보고 이 시를 성애의 묘사라고 보는 해석, 혹은 이 시를 동양적 유토피아의 묘사라고 보는 해석에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를 화해와 교감의 구현으로 볼 때 그 구현의 리듬에서 베토벤의 음악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첫 연 여섯 행의 템포보다 둘째 연 네 행의 템포가 빨라지고, 셋째 연 여덟 행의 템포가 훨씬 더 빨라지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이 시의 리듬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의 세 악장이 아다지오-알레그레토-프레스토로 구성된 것과 유사합니다. ‘월광’을 연주하듯이 ‘풀’을 낭송해보면 느낌이 다릅니다.
첫 연에서 풀은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눕고 드디어 웁니다. 둘째 연에서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고 먼저 일어납니다. 셋째 연에서 풀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먼저 일어나고 늦게 울어도 먼저 웃습니다. 이 변화는 바람이 점점 강해지는 것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시인의 아내 김현경씨의 기억에 따르면 시인이 이 시를 탈고하던 날 바람이 몹시 불었다고 합니다.
극도의 강풍 속에서 풀은 바람의 순간적인 강약과 방향의 변화에 따라 눕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구별이 안 되고 우는 것과 웃는 것이 구별이 안 되는 상태가 되며, 단지 작거나 큰, 느리거나 빠른, 무수한 떨림과 휘날림으로만 사람의 눈과 귀에 인지되게 됩니다. 이 상태를 교감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화해와 교감이라는 관계를 발견한다면 그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그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나 자신이 풀밭에 선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아예 풀이 되어 위와 같은 상상을 해보는 것이, 그럼으로써 이 시에 대한 공명을 이루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민엽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