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이야기] 투박함 속 영양 가득…어머니 떠오르는 푸근한 맛 ‘호박’

2024-11-18

드라마나 영화에서 ‘시골’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진부한 표현)가 있다. 노랗게 익은 벼 이삭부터 툇마루를 오가는 강아지, 마당에 널어놓은 마른 고추 등이다. 그리고 또 하나, 보기만 해도 푸짐함과 넉넉함이 느껴지는 늙은 호박을 빼놓을 수 없다. 청둥호박으로도 불리는 늙은 호박은 반찬이자 간식거리다. 그리고 가정상비약 역할도 했던 고마운 존재다.

찬바람이 불어올 무렵, 시골 할머니들은 호박 꿀단지를 만들기 위해 늙은 호박의 꼭지 부분을 도려내고 속을 긁어내곤 했다. 씨를 제거한 호박에 꿀과 대추, 때로는 인삼 한뿌리를 넣고 뚜껑을 덮어 약한 불에 푹 쪄낸다. 서너 시간 정도 익히면 맑고 달콤한 물이 고이는데, 따끈한 이 즙액을 마시는 것이다.

호박 꿀단지는 환절기 감기를 잡는 데 즉효이며, 온 가족의 간편 보양식이었다. 이뇨 효과가 있는 호박즙은 막 아이를 낳은 산모의 붓기도 빼준다.

늙은 호박은 결이 단단해 겨우내 거뜬하게 보관할 수 있다. 소화하기 쉬우므로 위가 약한 환자에게 좋고, 저칼로리에 섬유질이 풍부한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통한다. 흔히 죽으로 먹고 떡이나 강정·식혜 등 다양한 요리에 응용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추수감사절 무렵 곱게 으깬 호박에 설탕과 버터·계피로 맛을 낸 파이를 구워 먹는다.

호박은 열매 말고도 잎이나 씨앗·꽃까지 쓸모가 많다. 한여름에는 연한 호박잎에 짭짤한 강된장을 곁들여 쌈밥으로 먹는다.

흔하지는 않지만 꽃도 식용이 가능하다. 이탈리아에서는 호박의 수꽃을 따서 다진 고기와 채소 등을 채워 넣고 오븐에 굽거나 수프에 띄워 먹는다. 소금에 볶은 구수한 호박씨는 중국인들이 특히 즐기는 주전부리 간식이다.

황해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늙은 호박을 김치 재료로 쓴다. 호박김치는 김장을 하고 남은 배추와 무, 기타 부재료를 알뜰하게 활용하기 위한 허드레 김치다.

그냥 먹는 일은 많지 않고, 푹 익혀서 찌개로 만들어 먹는다. 호박김치로 끓인 찌개는 개성 출신의 실향민인 박완서 작가가 소설 ‘미망’에서 언급한 적 있다.

주인공 전태임의 모친인 청상과부 머릿방아씨는 한번의 실수로 친정 머슴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 사실을 숨긴 채 친정을 찾은 그녀는 먹고 싶은 음식이 있냐는 말에 “된밥에 호박김치나 푹 무르게 끓여주세요”라며 “제육 몇점 썰어 넣으면 참 맛있겠다”고 침을 꼴깍 삼킨다.

달달하고 쿰쿰한 김치에 돼지고기를 추가해 끓인 김치찌개. 말만 들어도 푸짐한 밥상이 연상된다. 뜨끈한 김치찌개를 갓 지은 밥 위에 넣고, 참기름을 몇방울 떨어뜨린 뒤 쓱쓱 비비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다. 한편 서해안지역에 가면 호박김치에 꽃게를 넣고 시원하게 끓여낸 게국지가 별미로 꼽힌다.

모양새가 투박한 늙은 호박은 못생긴 사람과 비교된다. 하지만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호박을 멸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당한 것 같다. 특히 요즘 같은 환절기,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호박은 저렴하고 구하기 쉬울뿐더러 맛까지 좋은 팔방미인이다.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에 있는 ‘수원죽집’에선 뜨끈하고 구수한 호박죽을 맛볼 수 있다. 살짝 거친 듯한 식감에 은은한 단맛은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온몸에 온기를 전해준다.

소박하지만 영양이 가득한 늙은 호박은 수수한 외양 속에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감추고 있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정세진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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