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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거실 책장을 보다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통색촬요>(한국고전번역원, 2016)입니다. ‘서얼 허통(許通) 기록’이란 설명이 책 제목에 붙어있네요. 조선시대 양반의 핏줄이지만, 양반 대접을 받지 못했던 서얼의 처우 개선에 관한 상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자식인 서얼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유학을 공부한 유생이지만, 관직에 나아가는 것도 제한되었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서얼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서얼 허통 논의가 시작된 것은 인조 3년(1625)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제학 최명길 등 홍문관 관원들이 ‘재능에 따라 인재를 거두어 써서 서얼의 억울함을 펴 주고 인재를 등용하는 길을 넓혀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이후 비슷한 상소가 있었지만, 조정의 적극적인 조치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조 49년(1773) 1월 26일, 영남 유생 황경헌이 상소를 올렸습니다. 지난해 12월에 이어 두 번째 상소였죠. 모든 상소가 왕에게 닿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경헌의 상소는 왕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상소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무릇 지극히 높은 것은 하늘인데, 사람은 모두 하늘을 하늘이라 부르고, 지극히 높은 분이 임금인데, 사람들은 임금을 임금이라 부릅니다. 불쌍한 신들은 사람의 도리가 거의 없어서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동생이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이는 부자 형제의 인륜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소년의 아랫자리에 있고, 나이가 같은데도 같은 줄에 나란히 서는 것을 배척당합니다.”
영남 유생 황경헌은 서얼입니다. 그는 서얼이 재능을 발휘할 관직이 제한된 현실과 지역사회에서의 차별을 말합니다. 같은 아버지를 두었으나 자식으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유생으로 서원이나 향교에 입교하더라도 양반자제의 뒷줄에 서야 하는 처지를 호소합니다.
<통색촬요> 속 서얼들은 스스로를 ‘해바라기의 곁가지요’, ‘쭈글쭈글한 목덜미에 누렇게 뜬 얼굴로 자기 집 아랫목에서 나란히 누워 죽고 말’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해바라기는 하늘의 태양이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존재입니다. 서얼은 충성을 다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기껏해야 해바라기의 곁가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목덜미 주름이 자글자글한 나이가 되어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는 하찮은 존재라고 한탄합니다.
서얼들의 계속된 호소는 영・정조 때 빛을 보게 됩니다. 서얼 출신 인재를 등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영・정조 시기는 ‘바큇자국에 고인 물속에서 고생하는 물고기’ 같은 신세였던 서얼이 은혜로운 물결 속에서 헤엄칠 수 있게 된 때였습니다. 그런데 황경헌의 상소를 보면, 임금의 명령이 지방에 제대로 미치지 못했나 봅니다. 특히 영남지역은 말이죠.
서얼 출신 지방 유생의 상소가 이어지고, 반대의견이 없지 않았지만, 임금은 서얼의 억울함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지방 사족(士族)의 저항도 끈질기게 이어졌죠. 정조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좌절은 금물입니다. 저항에도 차별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계속된다면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원영미 울산대학교 강사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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