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꺼풀’ ‘혀 말기’가 우성? ‘궤도 사태’가 한국사회에 던진 질문

2025-10-19

[주간경향] 학창 시절 과학 시간을 떠올려보자. 혀를 ‘U자’ 모양으로 말 수 있는 것을 ‘우성’, 혀 말기를 못 하는 것을 ‘열성’이라고 배웠다. ‘혀 말기’는 상염색체에 있는 한 쌍의 대립유전자로, 멘델의 법칙을 따른다’고도 배웠다. 혀 말기가 되는 이의 유전자를 ‘RR’ 혹은 ‘Rr’로, 불가능한 이의 유전자를 ‘rr’로 표기하며 혀 말기 가계도를 분석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혀 말기가 안 되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난 자녀 역시 혀 말기가 안 된다.

과학계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설명이 잘못됐으며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1940년 혀 말기가 우성 형질이라는 얘기를 처음 꺼냈던 미국의 유전학자 스터티번트는 혀 말기가 안 되는 부모에게서 혀 말기가 되는 자녀가 나오는 등 예외가 다수 있다는 점, 이후 일란성 쌍둥이 연구에서도 멘델 유전과 맞지 않는 사례가 나왔다는 사실을 들어 1967년 자신이 쓴 <유전학의 역사>에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여전히 이 사례가 일부 저작물에서 확립된 멘델 형질로 기재돼 있는 것을 보면 당혹스럽다”고 썼다.

지금의 유전학은 수십만 명의 염기서열을 분석해서 특정 형질과 관련 있는 유전변이의 위치를 파악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지만, 여전히 혀 말기에 어떤 유전변이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사실 혀 말기 연구는 굳이 연구비를 들여 분석할 만한 성격도 못 된다. 이미 20세기 중반에 혀 말기가 멘델 유전의 사례로 보기 어렵다는 예외 사례가 다수 보고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전 세계 중·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는 이를 멘델의 유전을 따르는 우성과 열성 개념으로 설명해왔다.

스터티번트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증거가 너무 미약해 다른 어떤 동물에서도 결론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도 인간에 대해서는 확립된 멘델 사례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혀 말기뿐 아니다. 귓불 모양, 보조개·쌍꺼풀 여부 등도 우성과 열성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인간의 유전 형질 상당수는 한 쌍의 대립유전자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러 유전자가 함께 작용하고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멘델이 연구한 완두콩보다 훨씬 복잡하다.

수능과 연계돼 오류 바로 수정되지 않아

2017년 ‘귓불’과 관련해 확실한 증거가 나왔다. 미국의 ‘23앤드미’라는 기업은 일반인들로부터 20만원 정도 금액을 받고 이들의 침을 분석해 염기서열과 혈통을 알려주는데, 과학자들이 23앤드미의 데이터 등을 활용해서 귓불 형성과 유전자의 관계를 분석했다. 이들은 귓불 형성과 연관 있는 유전자 좌위(locus)가 49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관련이 있다’는 게 곧바로 인과관계를 뜻하진 않지만 적어도 귓불 모양에 한 쌍의 대립 유전자만이 관여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이후 국내 교육계에서 혀 말기, 귓불 등 멘델 유전을 잘못 설명하는 사례를 교과서에서 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고, 2022년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이 지적이 반영됐다. 이에 따라 내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선택과목으로 배우는 ‘생물의 유전’ 교과서는 혀 말기나 귓불을 우성이나 열성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2015년 교육과정 교과서로 공부하는 현재 고2와 고3은 여전히 학교에서 우성과 열성으로 배운다. 대입을 위한 수능과 연계돼 중등 교육과정이 짜여 있다 보니 수험생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이 같은 오류가 바로 수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본명 김재혁)’가 지난해 EBS의 한 프로그램에서 쌍꺼풀 등의 형질을 우성과 열성으로 소개했고, 유전학을 연구하는 한 대학교수가 지난 9월 말 궤도의 설명이 “헛소리”라며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이른바 ‘궤도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를 ‘과학자와 과학 커뮤니케이터 간의 충돌’로만 보는 건 우리의 과학교육과 지식이 수능 위주로 짜여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EBS 관계자는 주간경향과의 전화 통화에서 “해당 프로그램에 언급된 우성, 열성 관련 내용은 현행 고교 2학년이 배우는 교과서에 실린 내용에 기반했다”며 “과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교과서 기반의 내용으로 학업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제작된 프로그램인 만큼 후속 조치 역시 신중히 검토해 학생과 시청자의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교과서의 오류가 수능 중심의 교과 과정에 따라 바로 잡는 게 늦어지면서 교과서 수준의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오히려 오류를 전달하는 장이 돼버린 셈이다.

과학 지식 전달서 정확성 도모할 시스템 필요

유전과 관련된 과학 지식이 잘못 전달되는 경우는 이뿐만이 아니다. 유명 수학 강사인 정승제씨가 강의 중 ‘엄마 유전자가 아들 지능에 영향을 준다’는 속설을 과학적 사실인 양 발언했는데, 이 영상이 현재 유튜브에서 계속 퍼져가고 있다. ‘X염색체에 지능 관련 유전자가 있고, 아들은 X염색체를 엄마로부터만 물려받기 때문에 엄마의 지능이 아들에게 유전된다’는 설명인데, 이는 과거 과학자들이 X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지능 저하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속설로 굳어진 오류다.

지능과 관련된 유전자는 성염색체인 X염색체뿐 아니라 남녀 모두가 갖는 상염색체에도 존재한다. 최근의 대규모 연구(GWAS)를 보면, 상염색체에서도 지능과 관련 있는 유전변이가 여러 개 발견된다. 더군다나 자녀는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무작위로 물려받는다. 부모의 유전정보가 섞이며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지고, 이 과정에서 작은 변이가 생기기도 한다. 환경의 영향도 지대하다. 진화유전학자인 이대한 성균관대 교수는 <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라는 책에서 “지능은 어느 정도 유전이 된다. 하지만 지능에 연관된 변이는 매우 많으며 각각의 효과는 대부분 아주 작다”며 “지능의 유전율은 100%가 아니라 절반 정도이다. 지능 차이의 상당 부분은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특성과 관련된 유전학에서는 잘못된 설명이 ‘유전자 결정론’이나 ‘우생학’으로 이끌 우려도 있다. 이에 일본 유전학계는 일반인들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용어 등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2017년부터 우성과 열성을 ‘현성(드러난 성질)’과 ‘잠성(숨어 있는 성질)’으로 고치고, ‘변이’라는 표현도 ‘다양성’으로 바꿔 부른다.

과학계에서는 한국사회가 궤도 사태를 어떻게 매듭짓는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대한 교수는 주간경향과의 전화 통화에서 “(궤도 사태를) 연구자와 과학 커뮤니케이터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건 건설적이지 않다. 둘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며 이렇게 말했다.

“과학을 문화로써 즐기는 대중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는 걸 제가 피부로 느낍니다. 연구자들의 지식을 전달해주는 소통 전문가들이 늘어난 덕분이죠. 연구에 몰입하는 연구자들을 위해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중간에서 소통 역할을 해주고, 연구자들은 그런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 지식의 전달 과정에서 정확성을 도모하고 자정작용이 가능한 시스템을 우리 사회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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