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혈포 품고 다녔던 의친왕, 日 경찰 앞 ‘대한남아’ 불렀다

2025-01-30

이난향의 ‘명월관’

이난향의 ‘명월관’ 디지털 에디션

더중앙플러스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 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던 이난향(1901~1979)이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긴 글입니다.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이자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기록 중 팩트가 명확지 않아 후대에 입증되거나 반박된 부분, 여러 등장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고 재구성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제5화. 의친왕의 항일

토요회는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모인 모임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친일파가 있는가 하면 배일파(排日派)도 있고, 사적으로도 서로 영합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인사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기미 3·1 독립선언 거사를 하기 직전 의암 손병희 선생께서도 명월관에서 열렸던 토요회에 참석하시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니까 토요회는 친일파든, 배일파든 일단 나라가 망하고 서로가 나라 없는 백성이 되자 무기력해지고 허탈한 상태에서 그저 만나 술이나 들고 환담이나 즐기는 목적 없는 당시 명사들의 모임이라고나 할까. 별다른 뜻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명월관 초기의 손님 중에서 잊히지 않는 분은 의친왕 이강공이시다. 의친왕은 고종황제의 아드님으로 숙원 장씨의 소생이었다. 순종이 후사가 없어 아우들 중에서 다음 계승자를 뽑아야 할 때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가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의로 미국·일본 등지에 외유를 하다가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등극,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후에야 서울로 돌아와 사동궁(寺洞宮)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의친왕은 구(舊)한국정부의 육군부장이었다. 합병 후에는 육군 중장이 되었고 무척 승마를 즐기던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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