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내 장인 박상희는 민족주의자
두 형제분 사이 그다지 친밀하지 않아”
최남근 등과 어울려도 포섭활동 막아
여순반란 사건때 처음 좌익계열 드러나
술자리서 터뜨린 불평이 보고돼 체포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사형 판결 받아
친분 있던 선후배들 곳곳서 구명 탄원
“좌익 색출 결정적 기여·작전 능력 탁월”
◇핑진부대에서 공산주의자들 경험
군인의 길을 선택한 박정희 앞길은 가시밭길이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1944년 7월 열하성 흥륭현 반벽산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8여단으로 배속되었다. 이듬해 7월에 중위로 진급했으며,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만리장성 산중에서 조국 해방을 맞았다. 제8여단의 당제영 단장은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를 무장 해제하고는 제8여단에 잔류할 수 있게 배려했다. 그러나 신현준, 박정희, 이주일은 당 단장에게 작별을 고하고 기차편으로 북경을 향했다. 상해임시정부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조선인을 광복군 산하에 편입시키려 했다. 이에 따라 신현준은 광복군 3지대 핑진부대의 대대장이 됐으며, 이주일은 1중대장, 박정희는 2중대장에 임명됐다.
박정희는 핑진부대에서 공산주의자를 두 번 경험했다. 첫 번째는 1945년 12월 10일 야외훈련 중 장개석의 중국군이 신현준, 박정희, 이주일 등 장교 출신 간부 전원을 영창에 집어넣고는 사라졌다. 신현준은 공산주의자들이 협조를 해 주지 않는 간부진을 혼내주기 위해 중국군에게 모략을 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박정희 중대장이 중대를 훈련시키는 중 몇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당의 회의 때문에 먼저 가보겠다는 하자, 이를 무시하고 훈련을 시켰다. 그날 저녁에 박정희 중대장을 규탄하는 회의를 소집하여 선동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핑진대대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을 할 수 있었고, 그 첫 경험은 기분 나쁜 기억이 되었다.
◇박상희로부터 이념적인 영향을 받았을까?
박정희는 1946년 4월 29일 북경을 떠나 천진의 당고항에 도착하여 1주일 머문 후 5월 6일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이틀을 항해한 후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는 5월 10일에 부산항에 상륙한 후 다른 귀국자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장충단 근처에 있던 귀국자 임시수용소에 며칠 머물다가 구미로 내려왔다. 작은 누나 박재희에 의하면 “그 당시 박정희의 모습은 밀짚모자, 반바지, 반소매, 옷, 운동화 차림이었으며, 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고 했다. 또한 “누구보다도 동생을 아껴주던 상희 오빠는 바로 옆집인데도 식사하자고 부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박상희는 해방 직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분국을 이끌면서 좌익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카 박재석은 박상희가 여운형 노선을 옹호하면서 이승만을 비난하는데 박정희는 좀처럼 그 주장에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고 했다. 김종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 10·1사건 때 사망한 셋째 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좌익에 물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멋대로 갖다 붙인 소리다. 내 장인 박상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 두 형제분 사이는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다.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이념적으로 박상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이재복, 최남근, 강창선을 만나다
먼저, 이재복과의 관계다.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46년 12월 조선경비대 포병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 제8연대에 배속되었다. 제8연대 연대본부 작전참모대리로 근무하면서 남로당 간부인 이재복과 접촉하고 있었다. 당시 김점곤 중대장은 “박정희가 친척이라고 속여 이재복을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초대한 뒤 원용덕 연대장과 나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점곤은 “뒤에 생각하니 이재복이 우리를 포섭하러 왔던 것 같았다”고 했다. 이재복은 1945년 9월 7일 좌익이 주도해 만든 조선국군준비대 경리부를 맡았으며, 경북도 인민위원회에서 선전부장 황태성과 함께 보안부장을 지냈다. 그는 당시 10·1대구폭동 후 도피 중이었다.
박정희는 1947년 9월에 소위에서 바로 대위로 승진한 뒤 조선경비사관학교로 옮기면서 강창선을 만난다. 그는 10월 23일에 입교한 5기생부터 가르치게 된다. 5기생부터 사관학교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으며, 교육기간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었다. 5기는 민간인만을 대상으로 모집한 첫 번째 기였으며, 약 3분의 2가 월남한 북한 출신 청년들이었다. 박정희는 1중대장, 그 아래 2구대장은 황택림 중위, 2중대장은 강창선 대위, 그 아래 2구대장은 김학림 대위였다. 박정희를 포함한 이 네 장교는 모두 남로당에 포섭되어 있었다. 이들은 1년 뒤 숙군수사 때 체포되고 박정희만 살아남았다.
박정희는 사관학교 중대장일 때 대구에서 남로당 군사부책 이재복과 함께 대구에 주둔한 제6연대장 최남근과 자주 어울렸다. 박정희는 사관학교로 부임해온 뒤 잠시 서소문의 한 여관에 묵고 있었다. 이때 조선경비사관학교 동기 한웅진 중위가 제6연대 헌병대장으로 있으면서 법무관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와서 박정희와 함께 한 달쯤 머물렀다. 제6연대장 최남근은 매주 한번 꼴로 박정희를 찾아와서 데리고 나갔다. 어느 날 최남근이 “한 중위도 같이 나가지”라고 했다. 박정희가 얼른 “저 친구는 공부하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갑시다”라고 말렸다. 몇년 뒤 박정희는 한웅진에게 “그때 최남근이 너를 포섭하려고 했는데 내가 말린 것이다. 너무 어리다고. 나와 최남근은 그때 효자동 이재복의 집을 출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 숙군을 지시하다
1948년 가을 백선엽은 신상철 헌병사령관과 함께 서울 안암동에 있는 이응준 참모총장의 집으로 불려갔다. 이 총장이 탁자 위에 있는 보따리를 가리키며 “대통령께서 내려 보내신 문서”라고 했다. 경찰청 김태선 치안국장이 작성한 군대 내 남로당 조직원 리스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 군사고문단 로버트 단장을 경무대로 불러 “이게 다 당신들이 불러들인 일”이라며 “미군정이 국방경비대 모집 때 군 요원을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선발하면서 이렇게 군대 내부에 좌익을 키웠으니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면서 보따리를 던지다시피 건넸다고 한다. 이 총장이 “아무래도 당신 두 사람이 비밀리에 숙군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백선엽 국장은 정보국 내에 좌익을 색출하는 작업을 담당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김안일 방첩과장과 서울 태릉에 주둔하던 1연대 정보주임 김창룡 대위를 직접 차출했다. 또한 경찰 정보계통에서 일해 온 이희영, 김진구, 이각봉, 박평래, 김안희, 정인택, 허준, 장복성, 노엽, 이진용, 이한빈, 빈철현 등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경찰에서 군인으로 신분을 바꿨다. 그리고 숙군에 필요한 제도적 정비의 일환으로 정보국 3과인 특별조사과를 1948년 11월 1일 특별정보대로 개편했다. 특별정보대는 1949년 10월 21일 방첩대로 개칭된다.
숙군 작업은 여순 제14연대 반란 사건으로 본격화된다. 1948년 4월 3일 5.10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장교 출신인 김달삼이 민청원, 자위대원 그리고 국방경비대의 좌익계열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폭동이 제주 4·3사태다. 10월 18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에서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출발 직전에 육군 중위 김지회와 지창수 상사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군에 잠입했던 좌익계열이 비로소 표면에 나타나게 된다. 10월 21일 국군은 광주에 반란군 토벌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때 박정희는 김점곤을 도와 상황판 정리, 작전 관계 보고서 작성과 같은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여순 제14연대 반란이 진압되자 박정희는 바로 서울로 복귀해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과장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에 의해 박정희는 체포된다.
박정희 체포와 관련된 김종필의 증언이다. 군내 좌익 검거에 열을 올리던 1연대 정보주임 김창룡 대위는 이미 사관학교 2중대장 강창선 대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 7기 특별반 1중대장 박정희는 강창선과 만주군관학교 동기이다. 강창선은 우수한 장교와 육사 생도를 당원으로 포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여순사건 직후 좌익계열 숙군의 바람은 거셌다. 김창룡은 나중에 육사 8기로 동기생이 되는 전창희에게 박정희를 감시하라고 밀명을 내렸다.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터뜨린 불평불만이 전창희를 통해 고스란히 김창룡에게 보고됐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그의 과격한 발언으로 1948년 11월 강창선에 이어 체포됐다.
김창룡은 남로당 군사부 연락원 이재복의 비서 김영식을 서울 삼청동에서 체포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김영식이 벽 속에 숨겨둔 남로당 군사 프락치 전모에 대한 비밀문서와 사진틀 뒤에서 암호로 된 문서도 압수했다. 어렵게 암호문을 해독한 결과 김영식이 가지고 있던 비밀문서에는 병기, 병력 등 군관계 기밀을 모조리 탐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500여명의 남로당 계열의 군인의 성명과 계급 심지어는 군번까지 암호로 기록해 가지고 있었다. 특히 군내 책임자가 오일균과 김종석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기록했다.
◇여러 경로 통해 이루어진 구명운동
남로당 군사책으로 협의가 밝혀져 사형이 확정된 박정희 구명운동은 여러 경로로 펼쳐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 정보국장이다. 1949년 초 김안일 과장이 그를 찾아와 박정희 구명을 부탁했다.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 분야의 중요한 책임자라는 협의를 받아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건물의 지하 감방에 붙잡혀 있었다. 박정희는 이미 혐의가 밝혀져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곧 수색에 있는 처형장으로 끌려갈 운명이었다. 김안일 과장은 “박 소령은 작전 계획 수립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훌륭한 인재이다. 그리고 군 내부의 좌익 색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며, 자신도 남로당에 가입한 것을 무척 후회하고 있다. 이 사람을 한번 살려 줄 수 없을까요?” 김 과정의 표정이 매우 간절했다.
백선엽은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서 데리고 온 박 소령과 대면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 과묵한 표정은 광주에서 본 모습과 다르지 않았으며, 이 대통령으로부터 건네받은 군대내 남로당 조직 명단에는 없었다. 그는 군복차림이었고, 계급장은 달고 있지 않았으며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아무런 수식어구가 없었다. “한번 살려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의연하기도 했지만, 처연하기도 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반드시 해야 할 말 한마디만 얼른 내뱉었지만 그는 꿋꿋했다. 비굴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라고 말했다.
당시 박 소령과 인간적으로 가장 친분이 있던 사람은 김점곤 전투정보 북한과장이었다. 그는 박 소령의 인물 됨됨이와 능력을 높이 사고 있던터라 여러 번 이응준 총참모장에게 구명을 탄원했다. 1949년 2월 8일에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박정희는 이응준 총참모장의 확인 과정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형집행 면제로 풀려난다. 김점곤 과장은 박정희 소령에 대한 조사 결과를 소상히 전해주었던 김창룡 대위로부터 박정희가 풀려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루를 기다렸다 아침에 찾아갔다. 아침을 먹고 있던 박정희는 벌떡 일어서더니 한걸음에 달려 나와 김 소령을 부둥켜 안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엉엉 울기만 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겉으론 꿋꿋하고 강인한 성격이었지만, 속으로는 정감이 풍부한 면모를 자주 보였다.
미군정청의 하우스만 고문관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박 소령에 대한 구명 건의는 백선엽, 정일권,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각각 따로 이 대통령에게 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박 소령은 진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유능한 장교라고 판단하여 살려주자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김종필의 증언과 일맥상통한다. 박정희가 구명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좌익의 발호를 부추겼던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협의는 밝혀졌지만 구체적으로 군내에서 남로당 조직 및 포섭 활동을 한 흔적이 없었다. 또한 군내 선후배들로부터 침착하면서도 치밀한 그의 업무능력을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숙군 작업, 대한민국 전화위복이었다
백선엽 정보국장이 주도한 숙군은 대한민국에 전화위복이었다. 먼저, 백선엽은 죽음의 문턱에서 박정희를 구해주고 또한 고비때 마다 보호함으로써 미래 산업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숙군을 통해 군내 사상 검증과 제도를 보완했다. 1948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제10호 법률인 국가보안법이 공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숙군 작업으로 군 내부에 잠입한 좌익세력을 제거했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자 김일성과 박헌영의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25 전쟁 전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북한이 남침을 하게 되면 남한 곳곳에서 인민봉기가 거세게 일어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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