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초여름, 피고인 A씨는 경기도 시흥의 한적한 빈 땅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주인 없는 땅이라 여겼던 것일까요, 아니면 주인이 있어도 묵인하리라 믿었던 것일까요. A씨는 그곳에서 배추와 무를 심으며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세월이 흘러 2014년부터는 사과나무를 심어 번듯한 과수원을 만들었고, 7년 넘게 정성껏 가꿔왔습니다. 나무는 A씨의 노력에 보답하듯 매년 가을 탐스러운 사과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2022년 가을, 평온하던 과수원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14년 전 이 땅을 상속받았으나 외국에 거주하느라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땅주인 B씨가 나타난 것입니다. B씨는 “엄연한 내 사유지이니 당장 나가고, 땅에 심린 사과나무도 건드리지 마라”며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수확철을 맞은 농부 A씨에게 그 말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20년 넘게 내 돈과 노력으로 가꾼 나무다!”라며 A씨는 보란 듯이 사과 160개를 수확했습니다. 화가 난 B씨는 A씨를 절도, 재물손괴, 횡령 혐의로 고소했고, 과수원 분쟁은 차가운 법정으로 옮겨갔습니다.
쟁점은 바로 이것: 훔친 것인가, 망가뜨린 것인가, 배신한 것인가?
이 사건은 겉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법리적으로는 아주 복잡한 쟁점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검찰과 땅주인 B씨의 주장: “민법상 남의 땅에 권한 없이 무단으로 심은 나무는 땅주인의 소유가 됩니다(이것을 ‘부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나무에 달린 사과도 당연히 B씨의 것입니다. A씨가 사과를 딴 것은 남의 물건을 훔친 절도이자, 나무의 가치를 떨어뜨린 재물손괴이며, 나가라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내가 가져야 할 사과를 가져갔으니 믿음을 저버린 횡령입니다.”
농부 A씨의 항변: “무슨 소리입니까. 이 나무는 묘목 값부터 비료 값까지 전부 내 돈을 들여 키운 것입니다. 땅주인이 이제 와서 나가라고 한다고 해서, 내 땀이 서린 사과가 갑자기 남의 것이 됩니까? 나는 훔친 적도, 나무를 부순 적도 없습니다.”
법원의 판단은?
하급심의 엇갈린 판단: 1심 법원은 ”법적으로 사과는 땅주인의 소유물“이라며 절도죄를 인정했습니다. 반면 2심 법원은 ”A씨가 나무를 관리해왔으니 절도는 아니다“라면서도, ”주인이 나가라고 한 뒤에 딴 것은 횡령이고, 사과를 따버려 주인이 못 갖게 했으니 재물손괴“라며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요?
대법원은 놀랍게도 A씨에게 전부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습니다(대법원 2025. 7. 17. 선고 2025도978 판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물손괴가 아닙니다. 대법원은 ”재물손괴란 물건의 효용, 즉 본래의 역할을 못 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과나무의 본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과를 맺게 해서 수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과를 따는 행위는 나무를 ‘용도대로 가장 잘 사용’한 것이지, 나무를 베거나 망가뜨려 ‘효용을 해친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주인이 사과를 못 갖게 된 건 안타깝지만, 그것이 나무 자체를 부순 건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 횡령도 아닙니다. 횡령죄가 성립하려면 두 사람 사이에 ‘믿고 맡기는 관계(위탁신임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대법원은 “땅주인이 나가라고 요구하고, 농부는 내 나무라고 맞서 싸우는 상황에서 무슨 신뢰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땅주인의 일방적인 요구만으로, 땅을 무단 점유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주인을 위해 물건을 잘 보관해야 할 의무’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대법원은, 비록 A씨가 남의 땅을 무단으로 쓴 것에 대해 민사상으로 돈(임대료나 사과값)을 물어줘야 할지는 몰라도, 이를 절도범이나 파괴범, 파렴치한 횡령범으로 몰아 형사 처벌할 수는 없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민사 문제는 민사 법정에서 해결하라는, 이른바 ‘형법의 보충성’ 원칙을 확인한 판결입니다.
박상홍 변호사 한 줄 정리!
남의 땅에 심은 나무의 열매를 따더라도, 이는 민사상 손해배상 문제일 뿐
재물손괴나 횡령죄로 형사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박상홍 변호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졸업 ▲대한변호사협회 형사법·가사법 전문 등록 변호사 ▲現 법무법인(유) 로고스 변호사·변리사 ▲ <2024 북한인권백서>, <금융피해 법률지원 매뉴얼>, <가정법원 너머의 이혼상속 상담일지> 등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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