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단속하고 DEI 정책은 휴지통으로
“부디 자비를” 호소에, 트럼프 ‘불쾌’ 역력
“마지막으로 간청드립니다, 대통령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나라에서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민주당과 공화당, 무소속 가정에는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자녀가 있고 일부는 목숨을 잃을까 무서워합니다. (중략) 작물을 재배하고 사무실을 청소하고, 양계장과 정육점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병원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 이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거나 적절한 서류가 없을 수 있지만 대다수 이민자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세금을 내는 좋은 이웃입니다. 대통령님, 부모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녀를 둔 우리 사회의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1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의 워싱턴국립대성당에서 열린 국가기도회에서 마리앤 버드 성공회 워싱턴 교구 주교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바라보며 이같이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뚱한 표정으로 설교를 듣다가 불쾌하다는 듯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기도회 후엔 취재진과 만나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며 “좋은 기도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도회 참석을 끝으로 공식 취임 행사를 마무리한 취임 둘째 날, 버드 주교가 언급한 이들은 하루아침에 달라진 세상을 맞았다. 소수자를 보호하는 다양성 정책을 폐기하고 이민자를 내모는 행정명령이 무더기로 승인되면서 미국 사회 분위기가 급변했다.
불법 체류 이민자에 대한 단속부터 바로 시작됐다. 트럼프 정부의 ‘국경 차르’ 톰 호먼은 이날 CNN 인터뷰에서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전국에서 불법 체류자 단속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호먼은 범죄 경력이 있는 불법 체류자를 중심으로 단속할 계획이지만, 범죄 경력이 없더라도 체포할 수 있다고 했다. 체포한 불법 체류자는 가둔 뒤 본국이나 제3국으로 추방하겠다고 덧붙였다. 벤저민 허프먼 국토안보부 장관 대행은 교회나 학교 등 ‘민감한 구역’에서도 ICE 요원의 단속 활동을 허용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적인 이민 정책과 대량 추방의 물결에 대응하기 위한 작업이 전국 곳곳에서 시작됐다고 전했다. 정부의 불법 체류자 단속에 협조하지 않거나 협조 자체를 금지하는 지방자치단체를 미국에선 ‘피난처 도시’라고 부르는데, 이들 도시는 주로 민주당 소속 단체장이 이끌고 있다. 대표적 ‘피난처 도시’인 로스앤젤레스(LA)를 포함한 캘리포니아는 이민자를 보호하기 위한 지침 정비에 나섰다. 롭 본타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은 취임식에 앞서 “(캘리포니아에선) 이민과 관련한 법 집행 목적으로 사람을 조사, 신문, 구금, 체포하는 것은 금지돼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 밖에도 여권에서 성별을 제3의 성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서비스도 사라졌다. 미 국무부는 그동안 여권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다른 성별 정체성을 뜻하는 ‘X’를 택할 수 있게 했지만 이날 오전 해당 칸을 없애버렸다. 조 바이든 행정부 당시 도입된 ‘X’ 칸에는 “우리는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자유, 존엄성, 평등을 옹호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이 역시 사라졌다.
연방정부 내에서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을 담당하는 모든 공무원은 이날부터 해고 절차를 밟게 됐다. 이날 바로 휴가 명령을 내리고 다음 날 오후 5시까지 해고하라는 지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들은 모두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승인한 행정명령에 따른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소외된 공동체에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차별과 무시를 몰아내는 일은 국가의 미래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바이든 전 대통령의 태도를 뒤집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CNN은 “차분한 바이든 시대가 지나고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불과 취임 이틀 만에 왜 수백만명이 그를 역사에 남을 만한 강렬한 인물로 봤는지, 또 왜 수백만명이 그를 깊이 두려워했는지 상기시켜준다”라면서도 “그는 수많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초반에 정책적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변화를 위해선 법을 통과시켜야만 하므로 시험대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