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록원이 15일 ‘12ㆍ3 비상계엄’과 관련한 기록물의 폐기를 금지했다. 지난달 10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국가기록원에 폐기 금지를 요청한 지 36일 만이다. 하지만 수사기관 조사에서 비상계엄 사태 관련 주요 증거물이 폐기됐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어 늦장 대응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기록원은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공공기록물법)에 따라 국가적 중대사안에 수사기관 요청이 있으면 기록물 폐기 금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공수처의 요청에 따라 국가기록원은 20곳의 기관에 이런 결정을 통보했다.
통보 기관은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대통령기록관, 국가정보원, 국방부, 행안부, 합동참모본부, 국군방첩사령부, 정보사령부, 육군본부ㆍ공군본부ㆍ해군본부 및 예하 부대, 수도방위사령부, 육군특수전사령부, 경찰청, 서울경찰청ㆍ경기남부경찰청 및 예하 경찰서, 국회사무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다. 이들 기관은 이날로부터 5년간 비상계엄 관련 기록물을 폐기하면 안 된다. 이를 어길 시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늦장 대응 논란에 “협의 오래 걸릴 줄 몰랐다”
하지만 주요 증거물의 폐기 의혹이 잇따라 제기돼 늦장 대응 논란이 일고 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공공기록물법에서 헌법기관의 기록물은 폐기 금지를 결정하기 전에 해당 기관장과 협의해야 한다고 규정해 국회사무처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협의를 거치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헌법기관을 제외한 나머지 기관부터 기록물 폐기 금지를 해야 했다는 지적에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공수처로부터 폐기 금지 요청이 온 대로 전체 기관을 함께 금지하려고 했는데 협의가 이렇게 오래 걸릴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앞서 시행한 현장점검도 부실했다는 지적도 있다. 국가기록원은 앞서 지난달 12~20일 헌법기관 두 곳을 제외한 18개 기관을 대상으로 현장점검을 했다. 현장점검에서 계엄사태를 전후로 각 기관에서 생산ㆍ접수한 기록물들이 누락되지 않고 전자시스템에 등록됐는지, 관련 문서들이 적절히 첨부됐는지 등을 살폈다. 점검 이후 기록원은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자시스템에 등록하지 않고 숨기거나 파기한 종이 형태의 문서들은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경찰 조사에서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은 비상계엄 선포 직전에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계엄 관련 문건을 문서 파쇄기로 없앴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계엄 사태 전후로 하달한 정치인 체포 명단을 계엄 해제 직후 폐기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최근 검찰 수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국가기록원의 현장 점검은 수사기관과 달리 강제성을 띄지 않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국가기록원의 기록 관리, 총체적 실패”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15일 성명을 내고 “기록 은폐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국가기록원은 어떤 긴급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비상계엄을 결정한 국무회의 회의록, 속기록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까지 확인됐다”며 “기록관리의 총체적 실패”라고 지적했다.
국가기록물의 관리체계 개선과 동시에 국가기록원의 독립성 확보도 시급하다는 진단이다. 노명환 한국외대 교수(정보ㆍ기록학연구소장)는 “국가기록원이 비상계엄 관련 기록 관리 및 점검 의지가 강했는지 의문”이라며 “어떤 정권이든 관계없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며 기록물을 관리하기 위해서 기관의 독립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유승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국가기록원이 행안부 소속이 아니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또는 감사원 정도의 독립기관이 돼야 한다”며“주요 회의록 등 필수기록물 생산 의무 위반에 대한 처벌 규정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